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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삶의 양식이다 -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송계 박영대 화백의 추천도서
보리(麥)를 넘으니 다시 보리(菩提)가 보여

  • 웹출고시간2015.11.26 18:34:08
  • 최종수정2015.11.26 18:34:07
[충북일보] 송계(松溪) 박영대(73) 화백의 집안은 온통 그림의 숲이었다. 갤러리나 커다란 병원, 혹은 관청 로비에서 마주했던 박영대 화백의 귀한 그림을 민낯으로 보니 감개무량했다. 그것도 금방 물감이 마른 듯 생기로운 작품들을 코앞에서 보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유화의 향이 가득 풍기는 것 같았다.

"방마다 그림들이 자리를 잡더니, 결국 거실마저 모두 차지했어요."

박 화백의 사모님이 마치 고만고만한 자식들을 대하듯 애정어린 눈으로 그림들을 둘러보았다. 그곳에는 푸른 보리밭 일렁이던 거대한 그림들은 자취를 감추고 원형질 모양의 미토콘드리아 같은 생명체들이 숲과 내(川)를 이루어 거대한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보리가 깨어나 새로운 생명을 탄생 시키듯, 박 화백의 경지는 어느덧 새로운 세상에 발을 디디고 있음을 넌지시 알 수 있었다. 윤범모 미술평론가는 박 화백의 변화를 주목했다.

'젊은 시절 박영대는 보리의 외형적 형태에 비중을 두어 화면에 담았다. 우여곡절의 세월을 보낸 후, 이제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다. 보리에의 천착(穿鑿) 즉, 세월의 적공(積功)이 쌓이면서 보리라는 소재는 생명성으로 상징화되는 변모를 보였다'
그런 박 화백이 거실 안쪽에서 들고 나온 책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였다. 지난 2010년 처음 출간된 이 책은 국내에서만 무려 200만부 판매고를 기록하며 우리나라에 새로운 '정의' 신드롬을 일으켰다. 박 화백의 그림 세계 안에도 '정의'가 구현되어 있는 것일까.

"읽은 지 꽤 오래되었지만, 인상적인 책입니다. 읽고 나면, 그 안에 찾고자 한 '정의(Justice)'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죠. 그저 질문만 가득 남는 책입니다. 담론을 통해 정의와 공공성 등 큰 가치에 대해 작가와 한바탕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같아요. 생각해 보면, 이 책의 내용이 예술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해줘요. 예술이 그렇거든요. 마치 양파 같아서 까면 깔수록 알 수 없는 것이 예술입니다. '정의'라는 화두를 가슴에 품고 사는 것은 나 같이 그림 그리는 사람들이 '진리란 무엇인가'라고 반문하는 것과 같아요."

그러고 보니 공동체의 사회 질서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정의'라면, 예술 세계에서의 '정의'는 곧 '진선미의 조합' 아닐까. 사진촬영을 위해 함께 온 지인이 "이것은 꼭 사람 같네요·"라고 그림을 보며 묻자, 박 화백은 천진한 아이처럼 미소를 지으며 다시 반문한다.

"사람이 보여요?"

그렇게 질문을 던지면서도 끝내 답을 주지는 않는다. 박 화백이 추천한 책, '정의란 무엇인가'가 '정의'에 대하여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것처럼.
저자 마이클 샌델의 주장대로 공동체적인 삶과 미덕이 발현되는 사회를 꿈꾼다면, 가장 선행되어야 할 것은 아마도 '정의란 무엇인가'에 관한 고민과 공감대일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한 권의 책으로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눈다면 우리가 조금은 더 정의로운 사회로 한 걸음 진일보 한 것은 아닐까.

"더 유명해지는 것도 원하지 않아요. 이제 그림이 조금씩 되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는 연습이었던 것 같습니다. 초년생의 기분으로 다시 시작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내 안에 무언가를 쌓으려 했다면, 이제는 그것들을 버리는 일을 해야 할 것 같아요."

비워내니 다시 무엇이 차오를 것인가. 지금도 박 화백은 매일 9시간 이상 그림 작업에 몰두한다고 한다. 심지어는 스스로에게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밥 먹을 자격이 없다.'라고 선언하는 것도 박 화백만의 정의((Justice)다.

보리가 가득했던 캔버스는 이제는 껍질과 외피를 벗고 보리의 본질만이 물결친다. 화려한 색채와 피안에 잡힌 현상은 벗겨지고 속살처럼 생명의 속성이 일렁인다. 간결한 리듬과 파장 그리고 뼈대만 덩그렇게 남아 윤회의 강에 다다른다.

그의 보리(麥)는 생명과 깨달음의 보리(菩提)로 다시 태어났다.

/ 윤기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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