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베이징의 자금성에서 커피를 판매하던 스타벅스가 7년만에 문을 닫았다. 중국당국이 일체의 상표를 내리고 커피를 판매하라는 주문에 문을 닫기로 결정했다. 상표와 상품과의 상관관계가 어느 정도인지 알려주는 대목이다.
제시문
(가) 집 근처에 하루 종일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 봐도 다 가보지 못할 만큼 많은 유흥업소들이 즐비하다. 몇 달을 두고 보면, 늘씬한 이벤트 업체 아가씨들이 신나게 춤추면서 개업을 알리는가 싶더니 이내 다른 업체의 아가씨들이 새로 단장한 가게 앞에서 춤을 춘다. 실로 대박을 꿈꾸는 자영업자들의 무덤이랄 수 있는 상업지구다. 하루 종일 글을 쓰다가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려면 반드시 나는 이 상업지구를 지나가야만 하는데, 그때마다 꿋꿋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치킨집이 보인다. 녹색 간판에는 스타닭스라고 씌어 있다. 이 칼럼은 맛집 칼럼이 아니니까 그 맛에 대해서는 생략.
어쨌든 스타닭스의 간판을 볼 때마다 그 재치에 놀라게 되는데, 그래봐야 중국 칭다오에서 본 커피숍의 제목에는 못 미친다. 몇 해 전, 중국 옌지(연길)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적이 있다. 거기 호텔 커피숍에 가면 한국식 커피라고 해서 맥심이나 테이스터스 초이스 등의 인스턴트커피를 판다. 심지어는 하얼빈에 있는 홀리데이인 호텔 커피숍에서도 그런 커피를 팔고 있었다. 그런데 인스턴트커피라는 게 각설탕을 넣다 보면 커피가 튀기도 하고 경망스럽게 작은 수저로 휘휘 저어야만 하는 등 호텔 커피숍에서 마시기에는 폼이 나지 않는다.
그러던 차에 여름에 칭다오에 놀러 갔다가 녹색 간판을 보니 꽤 반가웠다. 중국이라 그런지 상당히 저렴한 가격에 카페라테나 카페모카 등 그럴싸한 이름의 커피를 마실 수 있어서 기뻤다. 걸어다니며 카페모카를 마시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커피를 마실 때는 역시 폼이 중요해. 독일풍의 건물들이 즐비한 칭다오의 여름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나는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들고 온통 검은색 수영복을 입은 중국인들로 가득한 제1해수욕장을 거닐었다.
앗, 그런데 웬걸. 다 마신 커피잔을 버리려고 보니 스타벅스가 아니라 스타스벅이었다. 그러니까 에스(S) 자가 약간 앞으로 가 있었다. 그 에스 자를 빼놓고는 모든 게 똑같았다. 글자체며 색깔이며, 마치 거기가 뉴욕이라도 된 듯 마시던 내 꼴하며. 그런데 이상하게도 스타벅스가 아니라 스타스벅이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그 모든 게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나는 얼른 커피잔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어린 시절에 나이스 운동화를 신고 왔다가 친구들의 놀림에 그만 울어버린 동급생이 떠올랐다.
결국 나중에 베이징에 갔을 때, 진짜 스타벅스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이번에는 에스 자의 위치를 자세히 확인하고 마셨다. 그런데도 그 맛이 영 찝찔했다. 한 잔의 가격이 30위안이 넘었는데, 옌지에서 나와 친하게 지내던 대학 기숙사 수위의 월급이 400위안이라는 걸 알고 난 뒤였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매일 커피 마시며 폼 좀 잡으려면 온 집안이 한 달 내내 쫄쫄 굶어야만 했다. 그래봐야 14일째는 반잔밖에 마실 수 없다. 그때 좀 얄미웠다. 스타닭스와 스타스벅에는 없고 스타벅스에는 있는 그것이. 그러니까 그 비싼 스타일이라는 게.
(나) 사랑에 깊이 빠진 줄리엣. 로미오의 성이 몬테규라는 걸 알고는 심란해서 혼자 중얼거린다. “이름에 뭐가 있담? 장미꽃은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똑같이 향기로울 게 아닌가? 로미오, 역시 로미오란 이름이 아니라도 그 이름과 관계없이 본래의 미덕은 그대로 남을 게 아닌가.” 지난 500년 동안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름보다는 본질이 더 중요하다는 데 줄리엣과 생각을 같이해 왔다. 그러나 저작권법 전문 변호사들의 충고는 이와는 사뭇 다를 것이다. 본질이 아니라 이름 그 자체가 보호받아야 할 법적 재산이라고. 실제로 몇몇 경우에는 이름이 그것이 상정하는 것보다 더 중요해지기도 했다. 지난 다섯 세기 사이에 뭔가 아주 중요한 변화가 있었던 것은 분명한데, 그렇다고 우리의 연애 감정이 변했느냐 하면 그것은 또 아니다. 그 ‘뭔가’는 바로 기업과 상표의 등장이다. 경제사가 마이러 윌킨스(Mira Wilkins)는 상표와 기업의 등장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옛날에는, 여기서는 19세기로 넘어오기 전이면 어느 때든 다 옛날인데, 브랜드(brand)라는 개념이 전혀 없었다. 물론 옛날에도 드레스를 예쁘게 만드는 걸로 유명한 여자 재봉사가 있을 수 있었고, 맛있는 음식으로 알려진 요리사나, 탐스러운 토마토나 품종 좋은 소를 길러 인정을 받던 농부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만든 사람의 이름을 들으면 그 물건이 생각나는 것은 그 지방에서나 통하는 얘기였다. 도자기가 일단 중국을 떠나면 그건 그저 ‘차이나’였을 뿐이다. 뒤집어서 쓸 수도 있는 시리아산 식탁보는 다마스크(damask)로, 코르도바산 염소 가죽은 그냥 코도반(cordovan)으로 알려졌다. 농산물도 원산지 이름으로 구별되는 경우가 있었다. 예멘의 모카(Mocha)항을 통해 팔려나가던 커피에는 모카, 그리고 스페인의 발렌시아(Valencia)산 오렌지에는 발렌시아라는 이름이 붙었다. 포도주 같은 반제품들도 같은 방식을 따랐다. 포르투갈의 오포르토(Oporto) 지역에서 만든 달콤한 포도주는 포트(port), 스페인 헤레스(Jerez)에서 만든 것은 셰리(sherry), 프랑스 샹파뉴(Champagne)의 거품 나는 포도주는 샴페인이라고 불렸다. 이런 명칭들은 원산지를 표시할 뿐 물건을 만든 회사나 사람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었고, 물건을 연상시키는 ‘향취’나 ‘풍미’ 같은 특질을 나타내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리고 이렇게 지명이 붙은 경우는 사실 예외적이었다. 대부분의 제품들은 일단 고향을 떠나고 나면 이름에서 출생지를 알아볼 수 있는 흔적들은 모두 없어져 버리는 게 보통이었다.(중략)
상표 덕분에 기업들은 총판권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거대 복합기업들의 수중에 여러 분야의 사업이 집중되었다. 전문성을 전혀 갖고 있지 않은 기업도 유명 브랜드를 사들이기만 하면 쉽게 한 분야에 진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상표가 유용한 것은 거기에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소비자들이 친밀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래된 친구와는 달리, 브랜드는 자본의 요구에 충실히 따르는 비인격적인 자산일 뿐이다. 장미에 다른 이름을 붙여도 여전히 그 향기는 감미로울 테지만, 사실 장미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게 되면 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다른 이미지들이 떠오를 것이고, 그러면 회사의 자산으로서는 별 쓸모가 없어질 것이다. 이름이 도대체 뭐냐고? 이름은 손도, 발도, 팔도, 그리고 얼굴도 아니다. 그러나 기업에 이윤을 가져다주는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다) '논어(論語)'의 '옹야편(雍也篇)'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子日 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然後 君子(바탕이 문채(文彩)보다 승(勝)하면 거칠고 문채가 바탕보다 승하면 사치스럽다. 형식과 내용이 고루 어울린 후라야 군자이다.)
승(勝)하다는 표현은 물론 지금은 쓰지 않지요. 그러나 과거에는 매우 일상적으로 사용되던 말이었습니다. 이 구절에서 ‘승하다.’는 말은 여러분의 언어로는 ‘튄다.’로 해석해도 되겠네요. 내용이 형식에 비하여 튀면 거칠고, 형식이 내용에 비해 튀면 사치스럽다는 의미입니다. 행(行) 과 언(言), 사람과 의상(衣裳) 등 여러 가지 경우에 우리는 이러한 대비를 하고 있습니다. (중략)
여러분은 이 구절에서 상품 미학의 허구성을 읽는 것이 필요합니다. 신세대의 감수성이 상품 미학에 깊이 포섭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신세대뿐만 아니라 상품 미학은 현대 사회의 문화적 본질입니다. 상품 미학이란 상품의 표현 형식입니다. 상품이 잘 팔릴 수 있도록 디자인된 형식미입니다.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상품을 사용 가치와 교환 가치의 통일물로 설명하고 이를 상품의 이중성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상품은 교환 가치가 본질입니다. 사용 가치는 교환 가치에 종속되는 것이지요. 상품은 한마디로 말해서 팔리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사용 가치는 교환 가치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에 불과합니다. 상품 미학은 광고 카피처럼 문(文), 즉 형식이 승(勝)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우리의 감성이 상품 미학에 포섭된다는 것은 의상과 언어가 지배하는 문화적 상황으로 전락한다는 것이지요.
형식미가 지배하는 상황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형식미의 끊임없는 변화에 열중하게 되고 급기야는 변화 그 자체에 탐닉하게 되는 것이 상품 사회의 문화적 상황입니다. 상품의 구매 행위는 소비 이전에 일어납니다. 상품의 브랜드, 디자인, 컬러, 포장 등 외관, 즉 형식에 의하여 결정됩니다. 광고 카피 역시 소비자가 상품이나 상품의 소비보다 먼저 만나는 약속입니다. 광고는 그 상품에 담겨 있는 사용 가치에 대하여 약속합니다. 이 약속은 소비 단계에서 그 허위가 드러납니다. 이 약속이 배반당하는 지점, 즉 그 형식의 허위성이 드러나는 지점이 패션이 시작되는 지점이라는 사실은 여러분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반론이 없지 않습니다. 반품과 AS 제도가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하자에 대한 보상입니다. 광고 카피의 허구성을 뒤집는 것이 못 됩니다. 더구나 사용 가치를 먼저 만나게 하는 장치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즉, 상품 자체의 성격을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며 더구나 상품 생산 구조 자체에 대하여 하등의 영향도 줄 수 없는 것이지요. 결국 형식만으로 구매를 결정하게 하는 시스템의 보정적 기능에 불과한 것이지요. 반품과 AS 자체가 또 하나의 상품으로 등장하여 허구적인 약속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역설적이지요. 결국 많은 사람들이 그 배신의 경험 때문에 상품을 불신하고 나아가 증오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패션의 속도가 더욱 빨라집니다. 그러다가 한 바퀴 돌아서 다시 오기도 하지요. 어쨌든 패션은 결국 ‘변화 그 자체’가 됩니다. 상품 문화와 상품 미학의 본질이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새로운 것에 대한 가치, 그리고 변화의 신선함이라는 메시지는 실상 환상이고 착각이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가 상품 사회에서 도달할 수 있는 미학과 예술성의 본질이 이러한 것이지요. 상품을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세포라고 합니다. 세포의 본질이 사회체제에 그대로 전이되고 구조화되는 것이지요. 형식을 먼저 대면하고 내용은 결국 만나지 못하는 구조 속에 놓여 있는 것이지요.
(라) 사실 ‘소비’는 우리 산업 문명의 독특한 양상으로 간주할 수 있다. ‘욕구를 만족시키는 과정’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로부터 ‘기호를 조작하는 활동’으로서의 소비를 분명히 구분한다면 말이다. 소비는 우리가 행동의 순수한 구조를 균형 잡히게 하기 위하여 생산의 적극적인 양식에 대립시키는, 흡수와 적응이라는 수동적인 양식이 아니다. 소비란 ― 사물뿐만 아니라 집단과 세계와의 ― 적극적인 관계 양식이자, 우리의 문화 체제 전체가 기반으로 하고 있는 체계적 활동과 전반적인 반응의 양식이다.
물질적인 사물과 생산물이 ‘소비의 대상’이 아니라 ‘욕구와 만족의 대상’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언제 어느 시대나, 사람들은 구매하고 소유하고 즐기고 지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소비를 하지는 않았다. 고대인의 축제, 봉건 영주의 낭비, 19세기 부르주아의 사치는 소비에 속하지 않는다. 우리가 현대 사회에서 이 소비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우리가 보다 잘 그리고 더 많이 먹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더 많은 이미지와 메시지를 흡수하고 더 많은 기구와 장치를 마음대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재산의 정도와 욕구의 충족 여부는 ‘소비’라는 개념을 정의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 그것들은 소비의 전제 조건에 불과하다.
소비는 물질적 사용을 의미하지도, 풍요를 가시적으로 나타내지도 않는다. 그것은 사람들이 소화하는 음식물에 의해서도, 사람들이 입는 옷에 의해서도, 사람들이 사용하는 자동차에 의해서도, 이미지와 메시지의 구술적이고 시각적인 실체에 의해서도 정의되지 않고 ‘의미 있는 실제를 지닌 그 모든 것의 조직’으로 정의된다. 이제 그것은 어느 정도 일관성 있는 담론 속에서 구성된 모든 사물과 메시지의 잠재적인 총체이다. 소비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 한, 그것은 기호를 체계적으로 조작하는 활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