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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미군 노획 편지의 주인공을 찾습니다

충북일보, 이산가족찾기 차원 충북연고 12명 이름 공개
동생→형,오빠→누이,아들→ 아버지 등 유형 다양
'전종대'는 전쟁 와중 고향 청원 앞으로 4통의 편지
'충주지역 토지개혁' 운운은 사료적 가치 적지않아

  • 웹출고시간2013.06.10 19:38:43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인민군 병사 전종대가 1950년 9월 충북 청원군 강서면 현암리 103호의 누이 이순옥 앞으로 보내려고 했던 편지다. 성이 다른 데는 가족사적인 사연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속보= 재미 언론학자 이흥환 씨가 공개한 7백여통의 미군노획 편지 중에는 '받는이'(수취인)의 주소가 충청북도로 돼 있는 것이 모두 12통 존재하고 있다.(5월 10일자 3면)

당시 발신인(보내는이)들이 편지를 작성한 시점은 6.25 동란 와중인 63년 전으로, 미군이 평양으로 진격한 1950년 가을 무렵이었다.

따라서 당시 편지를 쓴 주인공들 중 일부는 아직 생존해 있거나, 6.25 휴전후 고향으로 돌아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받는이'의 대부분은 참전하지 않은 후방의 민간인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생존해 있을 가능성은 더욱 높다.

인민군 간부 박룡각이 1950년9월 충청북도 충주시 인민위원회 서기장인 친구 이원상에게 부치려던 편지다. 이원상은 충주 진입후 장기 체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남북 이산가족찾기 운동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의미에서 △편지를 쓴 주인공 △받는 이의 주소 △'누가 → 누구에게' 등을 상세히 소개한다. <표 참조>

①, ②, ③, ④는 어떤 이유로 북한 인민군에 입대한 '전종대'가 고향 '충청북도 청원군 강서면 현암리'의 후배 최수철, 누이 이순섭·순옥 등 2명 그리고 남동생 종옥 등 4명에게 보내려고 한 편지다,

⑤는 리충기가 복무지 황해도에서 충북 음성군 맹동명 쌍정리의 리덕기에게 부치려고 한 편지로, 둘은 부자간이다.

⑥과 ⑦은 평남 성천군의 김동빈이 충북 진천군 당부 김성래 등에게 보낼 예정이었던 편지로, 둘은 조카와 숙부 사이다. ⑦의 겉봉투 수취인은 '김성해'로 읽혀지나, 여러 정황상 김성래로 여겨지고 있다.

⑧, ⑨, ⑩은 원도히, 황수연, 최석준(10일자 소개) 등이 각각 충북 단양군 보안대, 충북 청원군 강서면 신전리(도구머리), 충청북도 청원군 오창면 기암리 등에 살고 있거나 주둔하고 있는 형 원영히, 황호열, 최석영 등에 보내려고 한 편지다.

⑪은 ⑤와 마찬가지로 전장(戰場)의 아들이 충북 음성군 대소면 삼정리 458번지의 아버지 문관분에게 부치려고 한 편지다.

⑫는 평남안도 희천군 박룡각이 충청북도 충주시 인민위원회 서기장인 이원상에게 보내려고 한 편지로, 둘은 친구 사이다.

이상을 유형별로 살펴보면 동생→형 3통, 오빠→누이 2통, 아들→ 아버지 2통, 조카→숙부 2통, 후배→선배 1통, 형→동생 1통, 친구→친구 1통 등의 분포도를 보이고 있다.

이중 충북 청원군, 강서면 현암리가 고향인 것으로 추정되는 '전종대'라는 인물은 전쟁의 와중에도 누이, 동생, 친구 등 앞으로 무려 4통의 편지를 썼다.

편지글의 내용이나 필체 등으로 미뤄 △평소 글쓰기를 많이 했고 △기독교나 가톨릭을 신앙으로 갖고 있었으며 △갓난애(이름 '적석' 추정)를 남겨두고 입대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원문 참조)

'순옥양 바드라' 원문( 괄호안은 현대문)

고향 삼천(산천)을 떠나 어연간(어언간) 가을이 돌아왔구나. 모든 곡식들은 고개를 수구리고(수그리고) 주인에게 축복을 하고 이때을(를) 답하여 순옥아 그간 내가 떠난 후에 몸이나 근강함은(건강함은) X주어라. 그리고 보면 다 적석범은 집을 떠난 후에 아무연(아무런) 업시(없이) 군무에 봉무하고 있다. 이것은 순옥에긔도(에게도) X는 덕으로 무사히 조국통일 위하여 힘끝(힘껏) 싸우고 있다. 아무쪼록 순옥아 너는 어머니에 교훈을 잘 듣고 조국을 위하여 힘끝(힘껏) 수고를 하여라. 그리고 순옥아 너는 서로 형재(형제)끼리 동무끼리 서로 사랑으로 놀어라(놀아라). 내가 너희를 사랑할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나는 무사하니~ 열심하여라. 할 말은 만으나(많으나) 이만 끝. 적석범. 1950. 9. 20

인민군 간부 박룡각이 1950년9월 충청북도 충주시 인민위원회 서기장인 친구 이원상에게 부치려던 편지다.(부분) 이원상은 충주 진입후 장기 체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박룡각과 이원상 간에 주고 받은 편지는 혈육이 아닌 '사상적 동지'의 관점에서 쓴 편지로, 나머지와 뚜렷히 구별되고 있다.(원문 참조)

특히 '남반부 토지개혁' 운운한 부분은 북한의 남침 의도를 부분적으로 읽을 수 있는 대목으로, 6.25 전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사료적 중요성도 큰 것으로 보인다.

본보는 '받는이'의 대부분은 참전하지 않은 후방의 민간인들로, 이들이 도내에 생존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만큼 당사자나 주변 사람의 제보를 기다리고 있다.

'1950년 가을 이후'의 후일담이 있을 경우 가감없이 지면에 반영할 계획이다. 연락처= 010-5483-6017.

/ 조혁연 대기자

'이원상 친우에게' 원문(괄호안은 현대문)

이원상 친우에게

동무의 편지를 읽고 즉시 나는 해답을 씁니다. 지금까지 3,4차에 걸쳐 편지를 받았지만 해방구에 편지가 곤란하다는 말에 해답을 하지 않었든(않았던) 것입니다. 충주군 인위의 서기장의 편지를 받으니 감상이 참 상쾨(상쾌)합니다.

나는 이제부터 북반구 후방의 형편을 말하겠습니다. 동무가 떠날 때는 한가한 시기였습니다. 물론 전시에 들어와서 정치 과업이 증대하는 것은 응당하지만 요사이는 좀 바쁩니다. 군중들의 동원된 테세도(태세도), 훈련된 행동으로서 더욱 적극적으로 동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수시 공급을 당하고 있습니다. 8월 20일에는 사인 상공에서 ‘구라당 전투기’(미 헬캣 전투기 지칭)가 야단을 첫습니다(쳤습니다). 그러나 아편의 손해는 조금도 없습니다. 도리어 우리는 경험과 단련이 되었을 따름입니다. 남조선 의용군들도 사인장에 많이 왕래합니다.

남반구, 즉 해방구 소식도 잘 압니다. 충주군위 서기장 동무의 환경도 잘 압니다. 었째든(어쨌든) 이미 연마된 정치적 수완을 남반부 해방구에서 멋있게 발휘하시는 일꾼의 맛을 보이시오. 우리들도 해방구에 갈 것을 열렬히 기대하고 있습니다. 4,5년간에 걸쳐 남반부 토지개혁을 운운하든 그것은 동무는 직접적으로 집행하였으니 영광입니다. 모든 힘을 승리와 전선에 바칩시다.

동무의 장손은 중학교에 입학하여 우수하게 공부하고 있습니다. 동무의 부인을 나는 각금(가끔) 맛나서(만나서) 동무의 이야기를 합니다. 안심하고 신변을 주의하여 충주의 사업을 혁신하십시요. 다음 편지에는 해방구의 소식을 (XXXX) 쟈미나는(재미나는) 것을 전하시오. 나는 동무의 내용을 군중강연 사업에 많은 실례로 인용합니다. 김장연(金長連) 동무의 소식은 경성서 충북으로 떠났다는 소식밖에 없으며, 그후 연락이 없습니다. 몸 건강하여 끛끛내(끝끝내) 승리를 위해, 맛날(만날) 때까지-.

9월 17일에 씀, 박룡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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