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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화

무심수필문학회 사무국장

나날이 성글어가는 들녘이 비움의 사유 속으로 이끈다. 실속 없이 분주한 일상은 틈을 내주는 데 인색하다. 아침 안개가 서서히 걷히는 창밖 정경이 마음을 차분하게 한다. 마름달 아침 풍경 속에서 문득 '할머니'라는 명사를 떠올린다. 가을걷이를 끝낸 들녘은 어딘지 내 유년시절 할머니의 모습과 닮아있다. 자식들을 위해 아낌없이 받아주고 내어주는 헌신적인 사랑, 흩어진 이삭을 주워 담듯 손자들을 보듬으셨던 까슬까슬하고 보드라운 황톳빛 따듯함….

몇 달 전에 할머니란 호칭을 얻었다. 시어머니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인들의 농담에 '시언니'라고 응수를 하곤 했는데, 또 다른 호칭의 어색함을 아직 떨쳐버리지 못했다.

지난 추석엔 처음으로 손자와 하룻밤을 보냈다. 추석이 다가올 무렵, 며느리가 가족들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한가위를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어린 아기도 있고 집도 가까우니 명절 아침에 일찍 오라고 했더니, 집에서 하룻밤 자고 싶다는 것이다. 혼인한 자식과 부모와의 관계에 대해 요즘 젊은 세대의 일반적인 사고와 문화를 주워들은 얘기가 많은데, 며느리의 마음 씀씀이가 대견하고 고마웠다.

이제 막 6개월에 접어든 손자 웅이는 낯을 조금씩 가리기 시작했다. 밤이 되자 잠자리가 신경 쓰였다. 하룻밤이지만 유아용 짐이 제법 많았다. 혼인하기 전까지 아들이 쓰던 방은 세 식구 잠자리로 비좁았다. 안방을 내주려는데 아들 내외가 극구 사양했다. 육아 때문에 밤잠을 설칠 때도 있다는 얘기를 들은 터라, 손자를 내가 데리고 자기로 했다. 은근히 손자를 봐주었으면 하는 눈치를 보이기도 했던 며느리가 흔쾌히 웅이를 내게 안겼다.

잠시 도리질을 치며 얼굴을 내 가슴에 비비던 웅이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조심스레 아기와 함께 누워 토닥였다. 쌔근쌔근 들리는 숨소리가 감미롭고 싱그럽게 귓가를 간질였다. 마음을 맑히는 숨결이 마치 짙푸른 밤하늘에 빛나는 별의 노래처럼 들렸다. 내 안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익숙하고도 생경한 느낌이 묘한 감흥을 준다. 기억의 책장은 어느새 삼십사 년 전 한 페이지를 펼쳐놓았다. 소환된 추억에 밀려 잠은 이미 달아나 버렸다. 아득한 시간의 갈피를 들추었다. 생명의 신비로움에 가슴 뛰었던 순간을 다시 음미하는 시간과 맞바꾼 숙면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꼼지락꼼지락 움직이던 아이의 발이 내 옆구리를 간지럽혔다. 발놀림이 유난히 활발한 아이는 태아 때부터 거센 발길질로 제 엄마를 종종 놀라게 하곤 했다. '어머님, 주무시다 보면 웅이가 거꾸로 누워있을지도 몰라요.' 했던 며느리의 말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연신 발길질하며 움직이는 모습이 90도로 회전을 할 태세였다. 왠지 건강한 기운이 쑥쑥 자라나는 모양을 보는 것 같아 흐뭇했다. 그지없이 사랑스러웠다.

창문을 기웃거리는 박명이 느껴졌다. 웅이는 두 번 깼다가, 내 품에서 다시 잠이 들었다. 손자와 보낸 첫 밤, 행복한 피로감의 여운이 색다른 새벽을 맞게 했다.

이젠 내 할머니의 모습은 체취와 온기로 더 선명하다. 훗날 우리 웅이의 기억 속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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