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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화

무심수필문학회 사무국장

"어! 나 아줌마 아는데…."

아파트 입구에서 만난 한 아이가 반가운 표정으로 아는 척을 한다. 나도 녀석을 금방 알아봤다. 며칠 전 공명共鳴을 일으키는 화법을 가르쳐 준 꼬마 스승을.

젊은 부부들이 많은 아파트에 살다 보니 어린이들을 제법 많이 만난다. 저출산이 사회적 과제로 회자하는 요즈음, 오가는 길에 아이들을 만나면 봄꽃을 마주할 때처럼 싱그러움을 느낀다. 핸드폰으로 누군가와 불평을 쏟아 놓는 아이도, 엄마 곁에서 떼를 쓰는 아이까지도 모두 꽃처럼 예쁘기만 하다.

수필창작 강의가 있는 월요일이면 마음이 분주해진다. 내 차를 기다리는 문우들이 추운 거리에서 오래 서 계시는 건 아닐까 하는 염려가 조바심을 부추긴다. 아침 일찍 서두르는데도 두 분이 기다리실 때가 많다. 출발이 늦은 날은 엘리베이터도 유난히 자주 멈추고,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오는 출근 차량의 꼬리는 더욱 길게 느껴진다.

그날은 통화하느라 조금 늦게 집을 나섰다. 승강기가 18층에서 멈췄다. 문이 열렸지만 타려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 집에서 나올 때, 엘리베이터 호출 버튼을 누르고 나온다. 그래서 먼저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사람을 기다릴 때가 종종 있다. 열림 버튼을 누르면서도 마음은 바빴다. '옆에 다른 승강기도 있으니 그냥 내려갈까?' 망설이는 사이 현관문 여닫는 소리가 들리고 하늘색 파카를 입은 한 사내아이가 나왔다. 조급한 내 마음과 달리 아이의 걸음은 여유로웠다.

"안녕하세요?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뜻밖이었다. 자연스러운 인사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상황에 걸맞은 예의 바른 꼬마의 태도가 기특했다. 초등학교 2학년생이었다. 짧게 주고받은 몇 마디에서 긍정적인 아이의 인성이 느껴졌다.

"이렇게 인사를 잘 하는 걸 보니 공부도 잘하겠구나?"

순간 아이가 머뭇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아차! 싶었다. 덕담으로 건넨 인사였는데 대답하기에 곤란한 질문이 된 듯했다. 괜스레 아이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것 같아 미안했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가 지상층에 멈췄다. 아이가 내리면서 특유의 여유로운 어조로 말했다.

"그런데 저 공부는 좀 못 해요. 엄마가 공부 잘하라고 맨날 말씀하세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전에 빠르게 응답해 주었다.

"괜찮아. 앞으로 넌 뭐든지 잘할 것 같아 분명히…."

밝은 표정으로 손을 흔드는 꼬마가 귀여웠다. 수줍은 듯 발그레한 볼에 번지는 미소가 사랑스러웠다. 아이가 남긴 고백의 여운이 내 안에 청량제처럼 퍼졌다.

질문의 질質은 '진실', '바탕'을 뜻한다고 한다. 즉 질문은 사물과 현상의 본질과 진실을 묻는 것이다. 아이는 마치 언어의 본질을 체득한 사람처럼 솔직한 대답으로 불편한 감정을 털어버렸다. 자존심과 결부된 곤란한 우문愚問에 정직한 현답賢答으로 타성에 젖은 나를 일깨워주었다. 진솔함은 불필요한 감정을 털어버리는 수단이 된다고.

맑고 가벼운 마음으로 사는 법을 어린아이에게서 배웠다. 마음 그릇의 불순물을 걷어내는 지혜를 가르쳐 준 꼬마가 훌륭한 스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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