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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애

수필가

비가 내린다. 투둑-톡! 툭! 유리창을 두드린다. 빗방울들이 미끄러지며 그리는 선 뒤로 무채색 도시가 배경으로 펼쳐져있다. 물안개 속 흐릿한 실루엣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오래된 주택 낮게 이어진 지붕들 끝자락에 신축 중인 아파트가 식물처럼 날마다 자라는 풍경은 언제 보아도 낯설고 생경하다. 빗방울이 굵어지며 창밖의 도시는 물무늬를 따라 몽환적으로 녹아내린다. 빗소리가 모르스 신호처럼 무덤덤한 가슴속 촉수를 건드린다. 걷고 싶다. 며칠 깊은 크레바스에 갇힌 듯 침묵하던 시간에서 탈피해 문을 나선다.

겨울비는 눈을 부드럽게 하고 들숨도 촉촉하게 만들어 걷기에 좋다. 오늘따라 차들이 지나며 내는 물 가름 소리가 시원하게 느껴진다. 큰 길을 건너 골목으로 접어들자 우산 위에서 부서지는 빗소리가 리듬이 되어 경쾌하다. 골목길에는 집집마다에서 풀려나온 삶의 냄새들이 물비린내에 섞여 흐르고 있다. 약간은 퀴퀴하고 시큼하기도 비릿하기도 한. 골목 끝 어느 집에서 빈대떡을 부치는지 진한 들기름 냄새가 풍겨온다. 비 오는 날이면 습관처럼 김치전이며 파전을 부쳐내던 어머니.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방에 모여 와글거리는 아이들의 무료함을 달래주던 그 손길은 기억 어드메에 이르면 내가 되어 있다. 빈대떡 앞에 두고 이야기꽃을 피우던 인연들. 박제된 기억들은 가슴 어딘가에 모여 있다 전도체를 만난 듯 꿈틀거리며 살아나온다. 그리움이다.

겨울비엔 그리움이 묻어있다. 그리움은 얼음 같은 내면에 균열을 일으키며 감성의 촉수들을 건드린다. 빗소리가 배경음악이 되어 흐르며 최소한의 필요에만 나무늘보처럼 반응하던 나의 귀를 섬세하게 열어준다. 그래서 겨울비는 안으로 스며드는 소리다. 여름비가 튕겨내는 타악기 리듬이라면 겨울비는 녹이고 젖어드는 발라드다. 여름비가 열기를 식히며 씻어주는 소리라면 겨울비는 단단한 벽으로 천천히 새어들어 가라앉아 있는 온기를 느리게 깨운다.

마을 공원에는 솔 내음이 희미하게 고여 있다. 운동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 공원 둘레길을 천천히 걸어본다. 솔잎마다 영롱하게 맺힌 구슬이 눈부시다. 산수유 붉은 열매와 검은 우듬지의 선명한 조화도 산뜻하다. 대롱거리던 물방울들이 역광에 반짝이다 이따금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바닥으로 내려앉는다. 젖은 낙엽들. 잘게 부서져 먼지가 되어가는 잔해들 사이 이따금 빗물에 제 모습 살아난 잎들을 보면 애잔하다. 바람에 날리고 밟히면서도 어찌 그리 온전하게 제 형상을 지키고 있을까. 그 잎들 위로 지나간 시간을 생각한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면서 그리움이기도 한.

비 때문에 음악을 듣는다. 비틀즈의 'In My Life'가 흘러나온다. 어린 시절 버스를 타고 지나쳤던 마을을 소재로 존레논이 만들었으나 많은 수정 끝에 지금의 가사로 완성하였다고 진행자가 설명해준다. 존 레논이 1940년생이니 'In My Life'를 발표할 당시는 이십대 중반의 뜨거운 청년이었다. 비틀즈가 인기 절정에 올랐으며 대중문화의 아이콘이었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어폰을 통해 들어오는 부드러운 멜로디와 달리 가사는 쓸쓸하다. 연인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 부분도 있지만 '내게는 기억할 장소가 있어요… 사는 동안 어느 곳은 변하였지만 어떤 곳은 영원해요.…이 모든 장소들은 그들만의 순간을 간직하고 있어요' 란 부분이 마음에 들어온다. 지나간 시간과 사랑 그리고 우정에 대한 성찰을 담은 가사는 슬픔이 부드러운 멜로디에 녹아들어 가슴을 아리게 한다. 팬들의 열광 속에서 자신의 의지와는 별개로 흘러가는 스타의 삶이란 한편으론 불안하고 공허함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돌아보며 내가 사랑했던 곳, 누군가와의 추억이 머물렀던 곳, 내 이야기가 담겨 있는 곳이 가끔은 그리웠을 것이다. 함께 했던 사람들 중 어떤 이는 떠나고 어떤 곳은 변하기도 하지만, 그 순간 그 모습 그대로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내게는 이 도시가 그렇다. 새로움이 자리하더라도 그 곳에 대한 기억은 그대로 그 시간 속에 있다.

도시 한 쪽, 스카이라인을 그리며 솟아오르는 신축 건물 뒤로 낯익은 산자락이 물안개 속에서 흐릿한 배경으로 흐르고 있다. 축축한 습기에 찬 기운이 목덜미를 파고든다. 봄날처럼 며칠 따스함에 익숙해진 몸은 갑자기 스며드는 냉기가 낯설지만 그런대로 또 순응하며 익숙해진다. 도시도 사람도 늘 낯익음과 낯섦,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들이 이질적으로 만나 물들어가며 나이가 든다. 어제의 낯섦은 오늘의 낯익음이 되고 새로웠던 것들은 친근하게 정이 들며 원래 그 곳에 있던 존재처럼 익숙해진다. 이근술, 최기호씨가 지은 『토박이말 쓰임사전』에는 '낯설다'는 말의 '설다' 말 뿌리가 '살다'와 같다고 서술해 놓았다. '설다'는 익숙하지 않고 정이 들지 않아 서먹한 느낌이었는데 덧붙여 논 서술 한 줄이 낯설다는 말에 생명을 부여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낯설다'는 역동성이 들어있는 젊은 말이기도 하다. 청년 때에는 익숙한 길보다 남들이 가보지 않은 낯선 길을 선택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같은 제목인데 국내 가수인 '신에손'이 부른 'In My Life'가 '낯설다'에 조금 더 가깝게 느껴진다. 뮤지컬 가수와 성악과 크로스 오버를 넘나드는 가수, 정통 트롯 가수.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낯선 세 사람의 조합이 만들어낸 하모니로 가사에 자신들의 삶을 담았다고 했다. 가사를 풀어보면 '무언가 찾으려고 쫓아가고 있었으나 풀 수 없는 매듭처럼 모든 게 더 복잡하게 꼬여만 간다. 갈수록 알 수 없는 미로 속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면서도 희미한 끝을 그리며 알 수 없는 길을 떠나고 있다. 마음이 벼랑 끝에 서 있지만 되돌아 갈수는 없기에 이대로 직진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다. 존 레논과 신에손 사이의 'In My Life'는 60년이라는 시간의 격차가 있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노래라고 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세상은 늘 낯섦이다. 꿈 많은 젊음에게는 더욱 그렇다. 미래를 알 수 없어 벼랑 끝에 선 듯 불안하지만 희미한 끝을 바라보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야 하는 게 삶이니까.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급해진다. 비와 눈이 오락가락 내리고 봄날 같이 온유하다 북극 한파가 내려온 듯 영하로 떨어지는 날씨도 낯설다. 그래도 내가 몸담고 있는 이 도시를 사랑하며 나는 오늘도 걷는다. 얼음 같은 마음을 균열 내며 들어온 비 소리를 들으며. In My Life를 흥얼거리며. 이 순간 또한 그리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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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철 헌정회장 "개헌 방향 '정쟁 해소'에 초점"

[충북일보] 대한민국헌정회(회장 정대철)는 27일 오후 2시 서울 여의도 국회박물관 대강당에서 '정치선진화를 위한 헌법 개정 대토론회'를 개최한다. 헌정회는 지난해 11월부터 헌법개정위원회를 구성해 개헌의 방향에 대한 연구를 통해 국가 100년 대계 차원의 조문을 만들었다. 이 연구에 이시종 전 충북지사도 참여했다. 정대철 회장은 "정쟁을 해소하는데 개헌의 방향의 초점을 맞췄다"고 설명했다. ◇헌정회가 개헌안 마련에 나서게 된 배경은. "헌정회는 오늘날 국민적 소망인 정치권의 소모적 정쟁 해소와 지방소멸·저출생 등 국가적 위기 상황에 적극 대처하는 것이 시급히 해결해야 할 국가적 과제라는데 인식을 같이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헌법에는 이러한 국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구 유럽처럼 정쟁을 중단시키는 장치인 내각불신임·의회 해산제도 없고, 미국처럼, 정쟁을 중재·조정하는 장치인 국회 상원제도 없다보니, 대통령 임기 5년·국회의원 임기 4년 내내 헌법이 정쟁을 방치 내지 보장해주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따라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헌법개정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에서 헌정회가 헌법개정안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동안 헌법개정은 여러 차례 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