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맑음동두천 -7.4℃
  • 맑음강릉 -2.1℃
  • 맑음서울 -6.6℃
  • 맑음충주 -7.1℃
  • 맑음서산 -1.9℃
  • 맑음청주 -4.9℃
  • 맑음대전 -3.7℃
  • 맑음추풍령 -6.0℃
  • 맑음대구 -2.8℃
  • 맑음울산 -2.3℃
  • 구름조금광주 -0.1℃
  • 구름조금부산 -0.4℃
  • 흐림고창 -1.7℃
  • 맑음홍성(예) -2.2℃
  • 흐림제주 5.2℃
  • 흐림고산 5.5℃
  • 맑음강화 -4.9℃
  • 맑음제천 -8.1℃
  • 맑음보은 -5.3℃
  • 맑음천안 -5.2℃
  • 맑음보령 -0.9℃
  • 맑음부여 -3.8℃
  • 맑음금산 -3.4℃
  • 구름조금강진군 0.7℃
  • 맑음경주시 -3.0℃
  • 맑음거제 0.2℃
기상청 제공

최근기사

이 기사는 0번 공유됐고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남한강, 그 물길 위의 인문학 - 도담행정기와 한진호

과거 낙방하자 친인척 일행과 물길로 단양까지 여행
배에는 항상 동자 탑승… 허드렛일 맡는 등 조수역할
일행 한벽루에 도달하자 난간치며 시읊어 '몰아지경'
한진호배 소강 땐 하루평균 28리, 하강은 60리 속도

  • 웹출고시간2015.09.14 17:58:47
  • 최종수정2015.09.14 15:18:16
[충북일보]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명종-광해군 연간을 산 한백겸(韓百謙·1552-1615)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역사지리서 《동국지리지》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청주와 인연도 깊어 목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 남일면에 시조 한란(韓蘭의 재당을 지었고, 그리고 '청주한씨시조유기서사비'를 상당구 운동동에 세우기도 했다.

그의 가까운 후손으로 한진호(韓鎭戶+木·1792-?)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31살 때인 순조 23년(1823)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그가 의기소침해 하고 있을 때 평소 가깝게 지내던 정혜교·이철유·정치순·정수교·정청풍·이후·성여 등 내외 친인척들이 그의 집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 대부분도 과거에 낙방했고, 평소 자주 이용하던 남한강 물길을 귀향하고자 했다. 한진호는 이들의 귀향과 동행, 평소 하고 싶었던 단양팔경 여행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 남양주에 이르러서는 정약용 집도 방문

남한강 물길 여행에는 이들 외에 장인 정의준과 배에서 조수 노릇을 할 동자(童子) 양천돌도 동승했다. 따라서 한진호가 뚝섬에서 빌린 배에는 자신을 포함해 10명이 승선했다.

김홍도의 '사인암도'. 종이에 담채.

ⓒ 자료제공 = 호암미술관
그는 1823년 4월 12일 한양 뚝섬을 출발해 9일만인 4월 21일 충주 목계에 도착했고, 이후 △4월 25일 단양 장회나루 △4월 26일 사인암 등을 경유한 끝에 4월 27일 단양 삼선암에 도착했다. 그 과정을 기록한 것이 《도담행정기》(島潭行程記)다.(표 참조)

한진호는 소강 여정 중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마재마을의 정약용 집을 방문했다. 이때는 정약용은 오랜 유배 끝에 고향에 돌아와 있었으나 건강상 이유 때문인지 대화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장인을 모시고 마을 안으로 들어가 정다산 승지 약용을 뵙고 그 큰 아들 학연과 이야기 하다가(…), 대개 정장(丁丈·다산 지칭)은 중년에 남쪽 땅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오랜 두에 석방되어 돌아왔는데, 나는 전에도 이곳을 지나면서도 한번도 뵙지 못하여 이번에도 지나는 길에 잠깐 뵙고 이야기하다가 이내 작별하여….'-<도담행정기 1824년 4월 13일자>

인용문은 다산이 남도 강진에서 28년간 유배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세가로서의 명망은 여전함을 보여주고 있다.

한진호는 4월 21일 충주목 가흥촌을 통과했으나 '충청도 일곱 고을의 전세를 여기에 거두어서 배로 운반하여 경강으로 가는 것이다'라고만 적었을 뿐, 이곳에서는 별도의 감흥을 남기지 않았다.

◇ 여행기에 기생도 처음 등장

충주댐 완공 전의 한벽루 모습이다. 지금은 청풍문화재단지로 이전했다.

일행은 4월 29일 강물과 건축물이 멋진 조화를 이룬 청풍부 한벽루에 당도했다. 일행 일부는 주위 풍광에 반해 배에서 노래하고 퉁소를 불었다. 이때 여행기중 처음으로 기생도 등장한다. (사진 참조)

'조금 있다가 사군(使君)은 그 손과 함께 누에서 내려가 조그만 배에 올라 기생을 태우고 물가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혹 노래도 하고 혹 퉁소도 불어 한동안 즐긴다.'-<〃4월 24일자>

사군은 당시 청풍부 부사를 지칭하나 정확한 인물 확인은 어렵다. 나머지 일부는 배에서 내려 한벽루의 난간을 두드리며 시를 읊는 등 과거 낙제의 우울함을 잊고 남한강 풍광에 빠져들었다.

'누에 걸려 있는 정관찰 호선(好善·정호선 지칭)의 시가 있음으로 우리들은 특별히 그 운을 따서 또 시 한 수를 지어가지고 흉치를 내어 난간을 두드리면서 큰 소리로 읊으니 소리가 뱃속까지 도달한다.'-<〃4월 24일자>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정호선은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충청좌도(지금의 충북) 지역의 병사를 거느리고 단양 죽령(竹嶺)에 진을 쳤다가 강화 성립으로 철수를 했던 인물이다.

한진호는 산골 기생들에 대해 '내가 보기에 하나도 미색(美色)이 없는데, 그 중에 이름을 운선(雲仙)이라고 하는 기생이 자못 곱다. (…) 유연히 정이 간다'라고 표현하는 등 조금은 복잡한 심정을 나타냈다.

◇ 도담삼봉, 당시에는 모래톱 존재

안개 피어오르는 도담삼봉 모습

ⓒ 자료 제공 = 단양군
일행은 4월 26일 사인암에 도착했다. 그는 사인암의 웅장함을 '백여 길의 석벽'이라고 표현했고, 동시에 석질(石質)에 대해서도 적확한 단어로 묘사하려 무척 애를 썼다.(그림 참조)

'대체로 돌무늬는 오색(五色)을 갖추고 있고 또한 주름잡는 법과 같아서 혹 누워 있기도 하고 혹 서 있기도 하며, 혹은 떨어지려 해도 떨어지지 않고 혹은 발돋음하고 서서 하늘로 올라가서 첩첩이 쌓이고 층층으로 겹쳐서 마치 바둑을 쌓은 것과도 같고….'<〃 4월 26일자>

한진호는 삼선암을 반환점으로 귀로에 나서 4월 29일 도담에 도착했다. 지금의 도담삼봉은 충주댐 건설로 인해, 큰 가뭄이 아니고는 밑 부분이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그 날짜 여행기를 '우리는 이 배를 타고 세 개의 봉우리 밑에 이르러 배에서 내려 봉우리 마루턱에 올라가 두루 살펴보니…'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는 배가 접안할 정도로 모래톱이 존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그림 참조)

한진호는 이후 △5월 1일 제천 의림지 △5월 6일 탄금대 △5월 7일 원주 법천 등을 경유한 끝에 5월 13일 출발지였던 뚝섬에 도착, 한양도성 안으로 귀가했다.

사진 왼쪽이 한진호가 '철곶'(鐵串)이라고 표현한 지역이다. 원래 지명은 '쇠꼬지'로 지금은 충주지역 교통 요지의 한 곳으로 변했다.

5월 1일-5월 6일 사이에 체류 기간이 늘어난 것은 박달재, 북창, 단월의 친인척과 지인들의 집을 많이 방문하는 등 뭍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 기간에 방문했던 '철곶'(鐵串)은 탄금대 건너편의 '쇠꼬지'를 의미하고 있다.(사진 참조)

한진호는 소강과 하강을 할 때 하루 전진 거리를 정확히 기록했고, 따라서 남한강 물길 여정의 속도를 가늠해보는 것이 가능하다.(표참조)

한진호의 남한강 거슬러 올라가기 여정(뚝섬→목계)

뚝섬→<4월 12일*40리>→평구역→<4월 13일*40리>→이수두촌→<4월 14일*20리>→물말독촌→<4월 15일*20리>→앙덕촌→<4월 16일*20리>→보통촌→<4월 17일*10리>→비석촌→<4월 18일*20리>→불아촌→<4월 19일*35리*수로 미상+육로 미상>→노림→(4월 20일*15리*옛집 체류+육로 15리>→법천촌→<4월 21일*60리*수로 50+육로10리>→충주 목계 영금리.

조선후기 역사지리서인 《대동지지》 등을 참고할 때 한양-충주목까지의 거리는 대략 2백80리 정도인 것으로 나타난다. 한진호는 충주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10일 정도 소요됐으나 중간에 육지에서 1박을 했기 때문에 남한강 순수 소강에 따른 물길 이동시간은 9일인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한진호가 탄 배는 남한강 소강을 하는데 하루평균 '28리'의 속도를 낸 것으로 나타난다. 다소 늦은 속도로, 강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기가 쉽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진호의 남한강 하강 여정(탄금대→뚝섬)

충주 탄금대→<5월 6일*20리>→가흥촌→<5월 7일*40리>→법천→<5월 8일*체류>→법천→<5월 9일*전체 육로 이동>→노림→<5월 10일*60리*육로10리 +수로50리>→비석촌→<5월 11일*90리>→마현촌→<5월 12일*60리>→몽동도→<5월 13일*수로 5리>→뚝섬.

반면 하강 때는 육지 체류와 뚝섬에 도착한 마지막 날을 제외하면 5일 정도가 소요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소강 때보다 4일이나 단축된 것으로 물살을 타고 내려오는 것이 훨씬 수월함을 보여주고 있다. 하강 때의 하루평균 속도는 소강보다 2배 빠른 60리 정도였다.

◇ 상업에 대해서는 여전히 천대 의식

한편 《도담행정기》는 선비의 의식세계, 남한강변의 음식, 뱃사공의 생활상 등 조선후기의 다양한 시대상도 보여주고 있다. 그는 4월 14일자 일기를 '양반이 배로 상업적 이익을 챙기면 안 된다'는 뜻으로 이렇게 적었다.

'뱃사공은 배대득이라 하고 그 선주를 물었더니 서진사라고 한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좋지 않게 여겨 말하기를, "아마 진사에 올랐으니 분명 이는 사족이요, 성이 서씨라 하면 대개 또한 현달한 문벌인데 시체에 종사하지 않고 오직 이익만을 쫓아 배를 사서 강에 띄워 나무와 숯을 실어 사가지고 갔다가 팔고 오니 족히 탄식스러운 일이로다.'

또 조선후기 충주지역의 남한강변 거주자들은 민물 생선회와 꽃떡을 즐겨 먹은 것으로 파악된다. 그는 5월 6·8일자 여행기를 각각 '비부(婢夫) 박암이 점심밥을 준비하고 닭을 잡고 생선을 회쳐서 찬을 만들어 먹었다', '낮에는 꽃떡을 먹었다'라고 기록했다.

이밖에 당시 남한강 상선에는 동자가 항상 탑승, 허드렛일과 조수 역할을 담당했다. 한진호는 5월 5·12일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소동(小童) 천돌이 배를 앓았는데 염탕(鹽湯)을 써서 회복하였다', '사공은 김광대이고 횃불을 잡은 동자는 고벽득이다'.

/ 조혁연 대기자
※ 이 기획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제작했습니다.

한진호, 나중에는 어떻게 됐을까

그는 1823년(순조 23) 정시 문과에서 급제하였다. 따라서 그는 남한강 물길 여행 후 얼마 안 가 다시 과거에 응시했고, 그때 합격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한때 진도에 유배를 가기도 했으나 비교적 평탄하게 관료 생활을 했다. 한진호는 지금의 차관급에 해당하는 정3품의 통정대부까지 승진했다.
이 기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관련어 선택

관련기사

배너

배너


Hot & Why & Only

실시간 댓글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