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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신드롬으로 본 이영남

진천출신 이영남, 노량해전서 이순신과 함께 전사
이순신-원균 사이 오가며 '연합함대' 구성
노량해전에서 빗발치는 탄환에 함께 전사

  • 웹출고시간2014.08.25 18:52:32
  • 최종수정2014.08.25 18:52:19

새롭게 단장한 진천군 덕산면 기전리의 이영남 묘소

ⓒ 자료사진
영화 '명량'의 공전에 히트에 힘입어 어느 때보다도 강한 이순신장군 신드롬이 일고 있다. 그러나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 곁에서 함께 전사한 인물이 이영남(李英男·1563~1598)이고, 그가 충북 진천출신이라는 점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특히 그는 이순신과 원균의 관계가 매우 소원할 때 양쪽을 오가며 중재자 역할을 수행, 경상우수영(원균)과 전라좌수영의 연합함대 구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는 이순신이 익히 봐온 이영남을 인간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무인으로서의 이영남의 일생, 특히 마지막 노량해전을 집중적으로 살펴본다.

원균(元均·1540∼1597)은 임진왜란 발발 당시인 1592년 4월 경상우수영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왜수군의 전력이 너무 강해 보이자 수군은 해산시키고 배는 불태워 수장시킨 후 혼자 육지로 도망하려 했다.

'왜병들이 바다를 건너오자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은 대적할 수 없는 형세임을 알고 전함과 전구를 모두 물에 침몰시키고 수군 1만여 명을 해산시키고 나서 혼자 (…) 육지를 찾아 적을 피하려고 하였다.'-<선조수정실록 25년 5월 1일자>

이때 부하 이운룡이 원균의 앞을 가로 막으며 "장수는 경내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며 눈물로 호소했다.

'사또가 나라의 중책을 맡았으니 의리상 관할 경내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 이곳은 바로 양호(兩湖)의 요해처로서 이곳을 잃게 되면 양호가 위태롭다. 지금 우리 군사가 흩어지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모을 수 있으며 호남의 수군도 와서 구원하도록 청할 수 있다.'-<〃>

원균을 결국 경상우수영을 버리지 못했고, 대신 이운룡의 건의대로 이순신의 전라좌수영과 '연합함대'를 구성하기로 했다. 그러나 상대 진영의 전체 동의가 있어여만 가능한 연합함대 구성은 쉽지만은 않았다.

이때 양진영을 오가며 청병사절 역할을 한 인물이 충북 진천 출신의 이영남(李英男·1563∼1598)이다. 그는 임진왜란 발발 당시 원균 휘하의 율포권관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권관은 조선 시대 변경의 작은 진보(鎭堡)를 맡았던 종9품의 무인 벼슬을 말한다.

그는 인간성과 성품에 매료되어 이미 마음속으로 이순신 충복이 된 상태로, 둘은 구면이었다. 이 점이 연합합대 구성을 가능하게 했다. 이영남의 연합함대 구성 제의를 받은 이순신은 그래도 부하들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었고, 처음에는 대부분의 부하들이 반대했다.

'영남의 말을 듣고 여러 장수들은 대부분 말하기를 '우리가 우리 지역을 지키기에도 부족한데 어느 겨를에 다른 도에 가겠는가' 하였다. 그런데 녹도만호 정운과 군관 송희립만은 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이순신에게 진격하기를 권하여 말하기를 '적을 토벌하는 데는 우리 도와 남의 도가 따로 없다. 적의 예봉을 먼저 꺾어놓으면 본도도 보전할 수 있다' 하니 순신이 크게 기뻐하였다.'-<〃>

이순신과 이영남은 이승에서의 마지막도 함께 했다. 둘은 패주하는 왜군을 한명이라도 더 수장시키기 위해 노량해역에 진을 쳤고, 그 결과 바닷물이 붉게 물들 정도로 대승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이때 왜군의 탄환이 빗발치듯 날아왔고 두 사람은 그것을 비키지 못했다.

'왜적의 시체와 부서진 배의 나무 판자·무기 또는 의복 등이 바다를 뒤덮고 떠 있어 물이 흐르지 못하였고 바닷물이 온통 붉었습니다. 통제사 이순신과 가리포첨사 이영남 등 10여 명이 탄환을 맞아 죽었습니다. 남은 적선(賊船) 1백여 척은 남해(南海)로 도망쳤고…'-<선조실록 31년 11월 27일자>

그 다음에는 "소굴에 머물러 있던 왜적은 왜선(倭船)이 대패하는 것을 보고는 소굴을 버리고 왜교(倭橋)로 도망쳤으며, 남해의 강언덕에 옮겨 쌓아놓았던 식량도 모두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소서행장(小西行長)도 왜선이 대패하는 것을 바라보고 먼 바다로 도망쳐 갔습니다"라는 좌의정 이덕형의 보고가 이어진다.

이때 이영남의 나이 36살이었고, 지금은 고향 진천군 덕산면 기전리에 영면해 있다. 참고로 원균은 본래 육군 출신으로 임란직전 청주 상당산성에 대한 보축공사를 한 바 있다.

/ 조혁연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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