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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소풍길 - 벌랏마을

봄빛 머금은 '천년의 종이'…전통 꽃피우는 사람들

  • 웹출고시간2011.03.31 18:19:56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 강호생
대청호반을 감싸며 마동을 지나 소전리 고개를 오르는 길은 높고 느리며 깊었다. 차량도 인기척도 뜸하니 더욱 그럴 것이고 한 고개 넘으면 또 다른 고개가 기다리고 있다. 그 고개를 지나면 저만치서 새 고개가 반기고 있다. 좁은 길을 따라 계곡물이 흐르고 호두나무와 감나무가 한낮의 작열하는 태양 앞에서 버텨내는 게 어질기 그지없다.

고개고개를 감싸고 있는 산천은 아름답고 쓸쓸했다. 바람과 햇살, 구름과 무성한 숲, 그리고 옹기종기 모여 앉은 민가들이 사계절 늘 그렇게 살아오고 있다. 포도넝쿨 아래로 붉은 포도송이가 뚝뚝 떨어질 것 같아 아슬아슬하기까지 하고 날짐승 들짐승 할 것 없이 노는 모습이 평화로워 지상낙원이 따로 없다. 그럼에도 가슴이 시리고 아픈 것은 아름다운 것들이야말로 스스로를 지켜낼 힘이 없어 저것들도 언젠가는 욕심 많은 인간들에 의해 더렵혀지고 파헤쳐지며 상처를 입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는 잊혀져가거나 버려지기 쉬운, 그렇지만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것들이 너무 많다. 특히 전통문화의 경우는 당장에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무한경쟁 사회의 경제논리에 밀려 명맥이 끊기고 사장위기에 처해 있어 안타까움을 더해주고 있다. 국보 1호인 숭례문이 소실되는 뼈아픔을 겪고 나서야 부랴부랴 우리 것을 되돌아보고 보존과 창조적 계승을 위해 목청 높이는 것이 우리네의 현실이다.

한지의 원료인 닥나무 껍질은 겨울과 봄날의 찬 바람, 맑은 햇살 기운을 받아 더욱 견고해진다.

문의면 소전리 벌랏마을. 첩첩산중의 오지마을이 요즘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다. 닥나무를 생산하고 한지를 만들며 다양한 작품을 창작하는 전통문화체험공간으로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 하늘만 빠끔히 보이는 산골짜기, 6·25 전쟁이 일어난 사실도 모르고 지내올 정도로 외진 마을에 화가 이종국씨가 터를 닦으면서부터 한지마을로 명성을 얻고 있다.

이씨는 마을 주민들과 함께 한지를 생산하고 해학적이며 익살스러운, 아름답고 정감 넘치는 시골풍경을 그려 넣는 등 독특한 한지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벌랏마을에서 자라는 닥나무와 대나무, 자연에서 채취한 염료를 갖고 조명등, 부채, 손수건, 솟대 등 기예와 감성미 넘치는 작품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의 곡진한 마음이 담겨 있는 돌탑 풍경이다.

한지는 씨앗을 심어 1년 동안 닥나무를 키운 뒤 가마솥에서 삶고 겉껍질을 베껴내야 하며, 닥풀과 함께 물에 풀고 뭉치며 두들기는 등 그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노력과 정성이 필요하다. 이처럼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만 온전한 작품으로 탄생하기 때문에 닥나무 재배에서부터 생산과 작품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함께 하는 작가는 국내에 몇 명 되지 않는다. 이씨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마치 자신의 삶처럼 소화해 내고 있다. 한지야말로 흙과 불, 물과 빛, 자연과 인간, 음과 양이 함께하는 생명의 결정체라고 주장하며 15년간 이곳의 주민들과 함께 땀과 열정을 쏟아 붙고 한지의 가능성을 찾아 나선 것이다. 그간의 노력 끝에 소전리가 농촌 전통 테마 마을로 지정됐으며 마을 입구에는 '벌랏 한지마을'이라는 이정표가 세워지고 한지 체험장이 들어서게 됐다. 벌랏마을 주민들에게 한지의 복원은 새로운 희망이 된 것이다.

한지는 천년의 숨결과 찬란한 문화를 묵묵히 간직하고 있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 직지가 1377년에 제작되고, 이에 앞서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751년에 제작될 때 한지는 그 중심에서 한 장 한 장, 한 땀 한 땀 소중한 역할을 했다.

전문가들은 한지가 천년을 견딜 수 있고 국내외에서 널리 사용될 수 있었던 것은 종이의 원료로 닥나무를 사용했는데 중국과 일본의 그것보다 섬유의 조직방향이 서로 90도로 교차하면서 질기고 균일하며 섬세한 입자를 형성하고 있는 특징이 있기 때문으로 분석하고 있다. 또한 한지제작 과정에서 원료에 들어 있는 전분 단백질 지방 등을 효과적으로 제거하는 기술을 갖고 있으며 종이의 입자를 섬세하게 하고 얇게 뜰 수 있도록 하는 독특한 기법을 갖고 있었다.

조상들의 슬기와 열정을 통해 생산된 한지는 우리의 삶 곳곳에서 소중하고 가치있게 사용되었다. 몇 겹의 한지로 만든 갑옷은 화살도 뚫지 못할 정도로 높은 강도를 갖고 있으며 창호지로 사용할 경우에는 빛과 바람을 통과시키고 습도를 조절하는 등 현대 과학의 산물인 유리보다도 실용적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밖에도 한지는 쌀독, 등잔, 요강, 물통, 책 장, 찻상 등 생활공간 구석구석을 아름답고 윤택하게 만들고 있다. 중국 역대 제왕의 진적을 기록하는데도 고려의 종이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중국과의 외교에서 조공품으로 강요되는가 하면, 임진왜란과 일제시대에는 일본으로 대량 유출되기도 했다. 하여, 지천년견오백紙千年絹五百이라 한 것이다.

벌랏마을 아래에 우물가와 빨래터가 있다. 마을 아낙들이 봄햇살을 맞으며 빨래를 하고 있다.

60년대까지만 해도 벌랏마을은 한지만으로도 부농의 꿈을 일굴 수 있었다. 닥나무를 재배하고 이것을 한지로 만들어 팔면 목돈을 챙길 수 있었고 이것으로 자녀들 대학을 보내고 시집장가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값싼 중국산에 밀려 한지의 명맥을 잇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촌로 한 분만 그 기술을 갖고 있지만 불편한 몸을 이끌고 한지를 생산하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래서 이씨는 한지에 더 많은 애착을 갖는다. 촌로가 살아생전에 무형문화재로 지정돼 한지의 맥을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갖는다.

이씨에게 벌랏마을은 모든 것이 작품의 재료이자 소재거리다. 이 마을의 황토를 천조각에 물들인 뒤 다시 감물로 염색하면 예쁜 손수건과 이불보가 탄생된다. 작가는 이곳에 들국화와 구절초는 물론이고 살아있는 들꽃들을 물들이거나 붙이는 등 자연의 숨결로 가득한 작품으로 완성시킨다. 바람에 떨어져 나뒹그는 낙엽까지도 작가에게는 소중한 재료가 된다. 이곳에서 만날 수 있는 새와 나비들의 힘찬 날개짓과 산언덕에 즐비한 대나무도 작품을 위해 꼭 필요한 존재다. 한지부채 등 한지작품마다 벌랏마을의 자연미로 그윽함을 더해 준다.

벌랏마을의 옛 담배건조장. 흙으로 빚은 건조장을 담쟁이넝쿨이 온 몸으로 감싸고 있다.

이씨는 최근에 담배건조실을 활용해 손수 2층짜리 작업공간을 만들었다. 인공의 꿈을 보여주는 작업장이 아닌 벌랏마을의 때묻지 않은 모습을 만날 수 있도록 했다. 작업장을 보는 것만으로도, 작가의 시골집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이 끌끌해진다. 발길 닿는 곳마다, 눈에 띄는 것마다 오달지고 천세나는 것들로 가득하다. 모든 것이 작가의 손때 묻은 것이고 작가의 숨결과 함께 해 오고 있는 것들이다.

미나리꽝이 초록의 빛으로 가득하다. 땅이 걸고 물이 많아야 미나리가 잘 자란다.

벌랏마을에는 골목길 논두렁 밭두렁 시냇물 우물 할 것 없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 온통 자연뿐이다. 집집마다 빛과 바람이 통하는 우리 종이 한지로 창과 문을 냈다. 햇살을 가득 머금은 한지 창에는 봄바람에 닥섬유의 고운 결이 춤을 춘다. 오고 가는 길마다 오종종 예쁜 꽃대궐이고 햇살까지 얼러러 상상디아 춤을 추니 내 마음은 봄기운으로, 예술혼으로 가득하다.

벌랏마을을 뒤로 하고 회색도시의 둥지를 향해 먼지 풀썩이며 돌아왔다. 폐교를 문화곳간으로 가꾼 마동창작스튜디오에서의 머무름도 잠시, 무심한 시선이 일렁이는 억새에 머문다. 동행했던 아내와 세 명의 딸들은 벌랏마을의 모든 것들이 낯설고 신기했는지 올 여름에는 하룻밤 자고 싶단다.

/ 글 변광섭(문화기획자, 에세이스트), 그림 강호생(충북미협회장), 사진 홍대기(청주성모병원 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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