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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호

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가는 곳마다 '명언'이라는 이름의 짧은 몇 마디 말을 적어 붙인 작은 팻말이 즐비하다. 그 말을 남겼다는 '명사'들 이름도 으레 덧붙는다. 고속도로 휴게소의 화장실도 그런 곳 가운데 하나다. 방뇨하는 짧은 시간도 허투루 쓰지 말고 그 안에 담긴 귀한 뜻을 마음 깊이 새겨서 실천하라는 뜻이리라.

'어떤 가치 있는 행동을 하지 아니한 날, 그날은 잃은 날이다.' 이 또한 어느 휴게소에서 읽은 '명언'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가. 이 말은 아메리카노 한 잔을 사 들고 버스에 올라서까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었다. 문장 하나에 '날'이라는 체언을 세 번이나 썼기 때문. 그보다는 몇 가지 의문이 자꾸 꼬리를 물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해내야 '가치 있는 행동'을 한 날이라고 할 수 있지? 맘에 쏙 드는 글 한두 편을 탈고한 날? 회사의 핵심 프로젝트 작업에 참여해서 큰 진척을 이룬 날? 오랫동안 서먹하게 지내 온 친구하고 소주 한잔 나누면서 유쾌하게 화해한 날? 영어 단어나 숙어를 100개 이상 새로 외운 날?

그런 일을 해야만 가치 있는 날인가. 그 '가치'는 누가 정하는 것일까. 아니, 그보다는 인생이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하루도 빠짐없이 그렇게 '가치 있는 행동'만 하면서 살아야 하나. 하루종일 밥이나 꼬박꼬박 챙겨 먹으면서 TV 리모컨을 손에 쥐고 놀았다면 그건 정말 아무 의미 없이 허비해버린 '잃은 날'이라고 단정해도 되는 걸까.

오전에 깡마른 국화꽃 웃자란 눈썹을 가위로 잘랐다 / 오후에는 지난여름 마루 끝에 다녀간 사슴벌레에게 엽서를 써서 보내고 / 고장 난 감나무를 고쳐주러 온 의원(醫員)에게 감나무 그늘의 수리도 부탁하였다 / 추녀 끝으로 줄지어 스며드는 기러기 일흔세 마리까지 세다가 그만두었다 / 저녁이 부엌으로 사무치게 왔으나 불빛 죽이고 두어 가지 찬에다 밥을 먹었다 // 그렇다고 해도 이것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

어느 한가한 날을 글감에 <일기>라는 제목을 얹어 안도현 시인이 쓴 짧은 시다. 이게 10여 년 전에 '문인들이 뽑은 올해 최고의 시'에 선정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글깨나 쓴다는 이들은 기러기의 숫자나 헤아리면서 한가하게 보내는 하루도 더할 나위없이 중요하다는 말에 동의했다는 증거 아니고 무엇일까.

차창 밖으로 눈부시게 펼쳐진 연두꽃(새봄에 피어나는 신록을 나는 그렇게 부른다.)을 바라보면서 자콥 보바트라는 이가 말한 '가치 있는 행동'을 곱씹다가 나는 이윽고 아까 읽은 그의 명언을 이렇게 바꿔보았다.

국화꽃의 눈썹을 잘라주든, 사슴벌레에게 엽서를 쓰든, 감나무 그늘의 수리를 부탁하든, 기러기 숫자를 세든, 두어 가지 찬에다 밥이나 먹든…, 들꽃 이름 하나를 새로 알았든, 어머니의 거칠어진 손마디를 매만지며 "제 어머니로 살아주셔서 고마워요."라고 말했든, 사흘 연속 술에 떡이 되어 들어와 코를 골며 자고 있는 남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래도 세상에 하나뿐인 소중한 내 남편'이라고 혼잣말을 했든…, 무언가 태어나서 처음 해본 일이 있는 날, 그날은 덤으로 얻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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