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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학교역사가 말한다 - 충주 교현초등학교

1896년9월17일 충북 교육의 효시 충주공립소학교 설립
일제, 여학생 댕기머리 자르고 여자정신대 징발 만행
한국의 역사 아닌 일본역사를 가르쳐 민족정신 말살 시도

  • 웹출고시간2015.05.21 16:18:18
  • 최종수정2015.08.17 14:54:08

현재 교현초 전경

[충북일보] ◇충북 근대교육의 태동

충북에서 가장 먼저 근대교육을 실시한 곳이 충주다.

구한말 나라의 운명이 매우 걱정 되던때 조국의 희망을 어린이 교육에서 찾고자 고종32년(1895년)에 '소학교 설치령'이 공포되고, 고종33년(1896년) 충주에 '충청북도 관찰부 공립소학교'로 문을 열어 올해로 개교 119주년을 맞는 교현초등학교가 바로 충북교육의 효시다.

40대 류효선 교장이 100주년 기념관에 진열된 각종 우승기 옆에서 자랑스런 학교의 연혁을 이야기 하고있다.

고종33년(1896년)8월4일 전국이 13개도로 개편되고 충주에 '관찰부(도청)'가 들어섰다.충주공립소학교는 향교의 명륜당 건물을 대용, 학문의 터전으로 삼아 문을 열어 충북 교육의 첫 발을 내딛었다.

충주소학교는 1895년7월19일 칙령145호로 공포된 '소학교령'에 따라 설립된 학교로 '충주공립소학교'라 칭하고 헌병대 관사(당시는 충주수비대가 위치, 현 성남동 옛 충주세무서 자리)에 위치했고, 한문을 가르쳤다.

그러나 1975년에 발간한 '충청북도지'에 따르면 '소학교의 심상과 3년과정의 교과목은 수신, 독서,작문,습자,산술,체조,한국지리,역사,도화,외국어의 1, 또는 수과를 가하고 여아를 위해 재봉을 가함 '이라고 규정돼 있고 '고등과 2~3년과정은 수신, 독서,작문,습자,산술,한국지리,역사,외국지리,외국역사,이과,도서,체조로하고 여아를 위해 재봉을 뒀으며 시의에 맞춰 외국어1을 둔 것'으로 돼 있어 여러과목을 배웠던 것으로 보인다.

교현초등학교의 전신인 충주공립소학교 교원에 황한동을 임명한다는 내용을 담은 관보 236호(1896년1월29일자)와 충청북도 관찰부 공립소학교 교원에 양주성을 임명한다는 관보 433호(1896년9월19일자)

그런데 관보제236호(1896년1월31일발행)에 1896년1월29일자로 황한동 교원을 서울의 관립소학교 교원2명과 함께 '판임관6등'의 직급으로 '충주공립소학교 교원'으로 임명한다고 기록돼 있어 이미 학교 설치가 완료된 것을 알수 있다.

따라서 교현초의 개교 기념일은 1896년9월17일이 아닌 1896년1월29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또 내각은 1896년9월16일자로 황한동 교원을 경기도 관찰부 공립소학교 교원으로 전근 시키고 충청북도 관찰부 공립소학교 교원에 양주성 교원을 새로 임명(관보 제433호)한다고 공포했다.

따라서 관보 기록으로 미루어 당시 충주공립소학교의 교육이 체계적인 궤도에 올랐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1905년1월20일 조한설 군수가 교장으로임명되었고, 당시 읍내에서 십수명의 생도로 경영되었던 사숙의 연장으로 공립학교라 칭하고 교사는 향교 명륜당을 대용했다.

1906년2월5일 개교와 동시에 20명의 아동이 입학했고, 1908년2월 충주읍 성내동 157번지(현 충주교육지원청과 KT충주지사 자리)에 교실6, 직원실 2개의 교사를 신축하고 이전했으며, 1909년3월28일 남자 15명이 제1회 졸업식을 가졌다.

그러나 순종3년(1908년)관찰부가 청주로 옮기면서 많은 사료가 유실돼 안타까움이 크다.

현재 1986년부터 1905년 이전까지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그 현황을 정확히는 알수 없으나 학적부가 남아 있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취학연령이 가장 많은 나이는 21세, 적은 나이는 14세로 보통 7~11년의 나이 차이를 보였다.

그러다 1910년8월29일 일제침략으로 우리의 교육이 중단되고 1911년7월31일 일본인 原田甚內가 교장으로 임명돼 이때부터 일본 교육이 실시됐다.

1920년월3월30일 여자1회 졸업식

당시 남녀차별에 따라 남자아동들만 교육이 이뤄줬고 여자들은 교육을 하지 않았다가 1916년4월 여자입학이 시작되었고 1920년월3월30일 여자1회 졸업식이 거행되었다.

당시 남자학교가 따로 있었고, 여자들은 1928년4월1일 충주읍 성남동102번지(옛 충주세무서 자리)에 8개교실을 신축, 여자부(분교장)을 설치했다.

1941년4월1일 댕기머리로 길게 길렀던 여자아동의 머리를 단발머리로 정리했다.

일제는 철저히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한글과 한국역사 공부를 시키지 않았다.일본 말과 글을 배우고 일본 역사를 국사(國史)라고 공부하도록 했다.조선 신궁을 찾아 신사참배를 통해 식민정책을 강화 했으며, 1929년 양계조합을 결성해 공동으로 기른 닭을 장에 팔아 교육비를 충당하기도 했다.

또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5년 3월 여자근로정신대를 징발, 12~14세의 나이어린 여학생 12명이 일본 군수공장으로 끌려가 8·15광복으로 귀국할때까지 강제 노역을 시켰다.

이들은 담임교사가 당초 출세 할수 있다는 감언이설로 꾀어 징발돼 갔으나 잘 먹지도 못해 항상 배고픔에 시달렸으며 얼마 되지도 않는 급료도 제대로 주지를 않아 고통에 시달렸다.

교현초 출신인 권태응(23회졸업)은 이때 동시 '감자꽃'을 지어 항일독립운동의 정신을 일깨운다.

'자주 꽃 핀건 자주감자 파보나마나 자주감자/하얀 꽃 핀건 하얀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라고 써 아무리 일제 식민교육을 실시해도 한국인은 한국인이라는 민족정신을 심어줬다.

그러다 1945년8월15일 광복을 맞아 일본인 직원전원이 해면되고 일본 교육이 전면 폐지 됐으며 신교육령에 따라 민족교육이 이뤄졌다.

◇6.25전쟁과 학적부

1932년 9월 1일 완공된 교사전경

1932년9월1일 교현동 399번지, 현재의 위치에 교사를 신축이전,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33년 교직원이 22명, 학급수 18, 학생수 1천32명으로 지금으로 봐도 굉장히 큰 학교였다.

◇암울했던 일제식민교육

1910년8월29일 경술국치로 한반도가 일제 식민지가 된후 1911년4월1일 '보통학교령' 개정으로 충주소학교가 충주공립보통학교로 개칭되고, 1911년7월31일 일본인 原田甚內가 교장으로 임명돼 일본식 교육이 시작됐다.당시에 일본인만 다니는 충주본정공립학교도 있었다.

1921년4월1일 학년을 연장해 6년제로 변경됐고, 1938년4월1일 최초로 '교현' 명칭을 사용하게 됐으며 1942년 국민학교령 실시로 충주교현공립국민학교로 개칭되었다.

6.25전쟁으로 완파된 본관전경

1950년6.25 전쟁이 발발, 7월4일 충주가 함락되자 북한군 소탕을 위한 유엔군의 폭격으로 2층짜리 목조건물이 두동강으로 허리가 잘렸고, 피란민과 주둔 미군의 무차별한 땔감 채취로 뜯겨 헐려지다가 화재로 소실됐다.

북한군에 충주가 함락직전 당시 교감이던 황갑봉 선생(16회)과 최수철, 최창호 선생이 모든 학적부를 교감사택으로 옮긴후 보안유지를 위해 황갑봉, 황순철 부자가 야밤에 사택앞 동편 귀퉁이에 있던 변소의 소변통 옆을 파고 영사기를 뜯어낸 상자와 사과상자에 싸서 묻어 놓은후 피란을 갔다.

당시의 변소는 시멘트통과 장독 항아리를 묻어 쓰던 재래식으로 냄새가 심해 누구나 혐오하던 곳이다.

1951년3월 귀향후 확인하니 누구도 손댄 흔적이 없어 당시의 학적부를 그대로 보존할 수있게 됐다고 한다.

◇교현의 인물

교현초가 낸 인물은 앞서 얘기한 항일시인 권태응(23회)을 비롯, 6선의원을 지낸 이종근(31회) 국회의원,박상규 전 국회의원(민주당 부총재),현 유엔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반기문(48회)등 수많은 인물들이 있다.

현재의 교현초에는 교정만 옛 자리일뿐 건물 등은 다 근래에 새로지어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이에 교현초 동문들은 지난1996년 개교 100주년을 기념해 기념지를 펴내고 기념탑을 건립했으며, '전통기념관'을 건립해 역사 자료들을 보관하고 있다.

충주 / 김주철기자 kimjc5611@hanmail.net

◇ 교현초 산역사의 증인 김영호 (94세,25회)

1928년 입학, 1934년 교현초 25회로 졸업한 교현역사의 산증인인 김영호 옹이 취재기자와 만나 대화를 하고 있다.

교현초 119년의 역사를 대부분 기억하고 있는 94세의 동문이 있어 화제다.

1928년 7살에 교현초에 입학, 1934년 12살에 졸업한 김영호(94, 충주시 성내동 현대타운 나동 303호)옹이 그 주인공.

따라서 1928년부터 현재까지 교현초의 역사는 물론 충주지역 역사를 훤하게 꿰고 있다.

김 옹은 "당시는 일제시대라 전부 일본식 교육이었어.'남녀칠세 부동석'이라고 남학생은 현 충주교육청 자리, 여학생은 옛 충주세무서자리에서 따로 분리돼 공부를 했는데 4학년때 지금의 교현동 자리로 이전했지, 그래도 앞교사는 남학생, 뒷교사는 여학생이 교실로 써 서로 왕래를 못했어요.혹여 남녀가 교실을 잘못 들어 가기라도 하면 뺨을 맞고 혼난어요 "라고 회고했다.

또 "만주사변때 비행기가 떴다고하면 전 학생들이 운동장에 뛰쳐나와 구경하곤 했다 "며 "1937년 조선말 교육을 폐지, 일본말을 국어라고 배웠다"고 암울했던 시절 얘기를 꺼냈다.

"동기생중에 살아있는 사람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는 그는 교현초를 졸업, 청주고, 경성 법학전문(현 서울대 법대)을을 졸업(1944년)할 만큼 뛰어난 학생이었다.

1945년 충주농고 교사, 1948년 충주사범학교 교사를 하다가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육군 소위로 6사단에 들어 갔고, 대구방위사령부 신병교육대 교관겸 중대장을 맡아 훈련병을 배출, 전쟁터로 보내는 일을 했다.

동락전투의 영웅 김재옥 여교사도 김옹의 충주사범학교 제자다.

"당시 총1자루에 200여명이 한번씩 만져보고 낙동강 전투에 참전했다"며 "풍전등화와 같았던 조국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슬처럼 사라져 간 그 희생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 "고 눈시울을 붉혔다.

낙동강 전투에서 청력을 잃어 큰소리로 말을 해야 알아듣는 그는 1954년6월 대위로 제대한뒤 제대장병보도회 충주지회(현 재향군인회)를 창설하고 초대회장을 맡았으며, 낙동강 전투의 희생자를 생각해 자신이 100환을 내고 회원들과 지역 유지들이 100만환을 보태 1955년 전국에서 최초로 순수 민간모금을 통해 탄금대에 '충혼탑'을 건립한뒤 추모행사를 거행해 왔다.특히 전국에서 유일하게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로 '忠魂塔'글씨를 받아 건립했다.

그는 1963년 북여중교장으로 교육일선을 떠난 후에도 충주농고, 충주여중·고 육성회장 등을 맡아 충주교육을 이끌어 왔으며, 5천1번이나 결혼식 주례를 설 만큼 충주의 역사와 시민발전에 밀접하게 관여해 왔다.

교현초 2학년때 타기 시작한 자전거를 94세인 지금도 타고 시내를 돌아다닌다는 그는 "다른 욕심은 없고 나라가 평온하고 남북통일이 하루 빨리 되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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