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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학교역사가 말한다 - 영동 영동초등학교

역사를 품고 미래의 꿈나무 육성

  • 웹출고시간2015.07.24 17:37:36
  • 최종수정2015.09.14 17:40:03

1930년대 영동초등학교(왼쪽) 전경. 교내에 걸린 가슴아픈 일장기가 선명하게 보인다. 오른쪽은 2015년 현재의 영동초등학교 전경

[충북일보] ◇ 사립학교로의 출발

1908년에 개교한 영동의 영동초등학교(교장 박영자)는 올해로 107년 됐다. 2016년 2월이면 106회 졸업생이 배출된다.

대한제국 말 근대교육운동의 영향으로 설립된 기호흥학회는 교육 계몽운동을 추진하면서 교육운동을 주도할 지회 및 학교 설립을 적극 장려했다.

특히 근대교육은 사립학교 설립을 통한 교육구국운동과 맞물려 확산됐다.

본관 건물내에 걸린 영동초등학교 역대교장 사진

근대교육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될 때 영동초등학교의 전신인 사립계산학교는 군수와 지역 유지들이 협의해 1908년 5월 5일 4개 학년 단급편성으로 시작해 이듬해인 1909년 1회 졸업생 40여명을 배출했다.

이후 1910년 4년제 4학급의 공립 영동보통학교로 설립인가를 받아 1920년 수업 연한이 남자 학급만 6년제로 연장돼 1922년 제12회 졸업식에서 처음으로 6학년 전 과정을 수료한 졸업생 16명을 배출하게 된다.

이후 영동공립심상고등소학교(1938년), 영동남정공립초등학교(1941년)으로 교명을 바꾸었다.

이처럼 영동초등학교는 한말 애국계몽운동과 발맞추어 을사늑약 이후 일제의 노골적인 식민지화시기에 풍전등화 같은 시대적 흐름 속에서도 '약육강식', '우승열패'라는 것을 인식하고 '아는 것이 힘'이라는 불변의 진리와 같은 명제를 근대교육운동으로 몸소 실천한 선현들의 기개와 재산을 아낌없이 기부해 학교를 운영했다.

◇ 광복 후의 영동초

1945년 8월 광복 후 고등과가 8월에 폐지되고 9월에 재개교해 11월 영동공립국민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

하지만 1950년에는 6·25사변으로 7월 철거령이 내려 휴교를 하고 10월 개교하기에 이른다.

1952년 공비내습으로 인해 강당(120평)과 교실(40평)이 손실됐다.

1955년 미8군원조로 12교실 공사를 착공해 미8사단 21연대, 10연대, 16연대의 공사 추진으로 교실을 완공했다.

영동초 운동장 확장 노역동원 모습

1961년에는 화신분교를 지어 설립 운영했고(1993년 3월1일 폐지) 1965년 부용국민학교를 분리했다.

1980년 병설유치원이 개원됐으며 2000년에는 화곡 초등학교를 통폐합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질곡의 역사와 함께 한 영동초등학교

대한제국 말 일본의 식민지화가 본격화 되던 시기에 근대교육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의 영향을 받아 사립학교로 출발한 영동초등학교는 우리 민족의 질곡의 역사와 함께 아픔을 함께했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 6·25전쟁의 아픔 속에서도 후세대를 향한 교육 열정은 계속됐다. 영동초등학교는 2015년 2월 105회 졸업식이 있었으며 현재까지 총 2만20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지난 2008년 본관 건물 앞에 세워진 영동초 개교 100년 기념비

졸업생 중에는 연세대학교 부총장을 지낸 유주현(36회), 전 산림조합중앙회장 이윤종(37회), 전 충남·충북 부지사 장의진(38회), 전 대한전문건설협회 이사장 여관구(39회), 전 영동군수 손문주(40회 졸업)·박완진(40회 졸업), 전 대한씨름협회 회장 최창식(43회 졸업),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동아닷컴 대표이사 정구종(46회 졸업), 전 헌법재판관 송두환(51회 졸업), 전 영동군수 정구복(39회) 씨 등 걸출한 인재를 배출했으며 동문들은 지난 2008년 개교 100주년을 기념해 100년사를 펴내고 기념비를 건립하기에 이른다.

◇ 앞으로 100년을 향한 비전

1908년 개교 이후 험난한 역사 속에서도 교육부지정 연구학교, 도지정 시범학교 등을 지속적으로 운영하며 창의적인 인재 육성에 매진해 왔는데 '함께하여 더 즐거운 학교'를 캐치프레이즈로 해 국악 꿈나무, 발명 꿈나무, 글로벌 꿈나무를 육성하고 있다.

2000년 창단해 올해로 15주년이 된 국악 관현악단 '해울 소리' 운영을 통해 국악 꿈나무를 육성하고 있다.

이를 위해 난계국악단과 연계한 전문 강사진을 활용해 전통 문화를 계승 및 발전시키고 있으며 다양한 전통음악 체험을 통한 조화로운 인격 형성 도모하고 있다. 특기와 적성 및 소질을 계발한 결과 전국 난계국악 경연대회 및 구미 전국 국악경연대회에서 금상 등 다수 실적을 거두었다.

창의적인 어린이 육성을 위한 '발명 꿈나무 육성'을 위해 꿈나무 발명반, 1일 발명교실, 학부모 발명교실, 발명영재교실 등 다양한 발명 교육 프로그램을 적용하여 창의적인 문제해결력을 신장시키고 있다.

지난 2008년 영동초 개교 100년 기념식수

이 외에도 발명영재캠프, 발명축제 한마당, 창의발명교실 등을 운영해 발명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높이고 발명영재아를 조기 발굴, 육성한 결과, 제36회 전국학생발명품경진대회에서 대통령상(6학년 나현명)을 수상하는 쾌거를 거두었다.

유네스코 학교 운영을 통한 '글로벌 꿈나무'를 육성하기 위해 지속가능발전교육과 세계 시민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특히 우리는 미선나무 지킴이, 고장의 전통을 품은 영동 어린이, 교실창가 꼬마농부 프로그램을 통해 자발적 탐구기회를 제공해 문제해결력을 신장시키고 있으며 평화와 인권의 메아리 노근리, 국제문화이해교육을 통해 고장을 알고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영동초는 100년의 역사를 가슴에 품고 100년의 미래를 준비하는 꿈나무를 육성하기 위하여 학생, 학부모, 교사 모든 교육가족이 한 마음으로 꿈과 사랑이 가득한 행복한 학교를 그려가고 있다.

/ 손근방·김병학기자

<인터뷰> 영동초 40회 졸업생 차영택씨

영동초 40회 졸업생 차영택씨가 100년사를 보며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당시 일제강점기와 6.25 때문에 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수난과 고난의 연속이었지."

영동초등학교 40회 졸업생 차영택(79·전 영동군청 공무원)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차 씨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학교는 전방에 보급품을 수송할 일본군 기마부대가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없어서 명륜당이나 학당 등에서 나누어 했었다"며 "전쟁에 패한 일본군은 철수하기전 학교 운동장에서 사용하고 남은 사무용품을 몽땅 태웠는데 연필, 공책이 아주 귀한 시기여서 어린마음에 아까워 한참동안 바라보기만 했으며 학교로 돌아와 공부를 마음 놓고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 그는 "현재 영동군청자리가 신사자리로 매일 계단을 올라 참배한 후 학교에 등교를 해야 했으며 반장격인 동네 최고 고학년이 일일이 신사참배를 체크하는 등 매우 엄했다"며 "교장은 군복을 입은 일본 군인이 맡았고 친구와 인사 등은 일본말로 해야 했으며 조선말을 하다 들키면 나누어 준 딱지 5장을 모두 빼앗아 벌칙으로 화장실 청소를 해야 했다"고 했다.

또한 그는 "패망직전엔 동원된 학생들이 학교주변에 직접 방공호를 만들어 비행기가 오면 대피하는 훈련을 많이 했던 기억이 나며 지금의 민방공 훈련과 같다"며 "이 때문에 공부는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해방이 되고 유낙원 교장선생님이 조회 때 학생들을 모아 놓고 이제부터는 마음 놓고 조선말을 해도 된다"며 "그동안 못한 공부 열심히 하라는 훈시를 들었다"고 덧붙였다.

특히 그는 "당시는 책걸상하나 변변치 않아 돌을 책상삼아 양철을 뜯어 칠판으로 사용했으며 선생님들도 실내화가 없어 나무로 만들어 신었으며 운동장 확장공사에 동원돼 흙을 채우는 작업을 하느라 고생은 물론 월사금을 내지 못한 학생은 아예 쫓겨나기도 했는데 학교가 멀어 지각을 밥 먹듯이 한 학생들도 많았다"며 "6.25때는 덕유산에서 활동하던 빨치산들이 밤에 내려와 학교강당을 태워 일부 학교자료가 소실되는 일도 있었으며 미군들의 보급품인 설탕을 받거나 옥수수가루로 국수와 죽을 쑤어 먹은 기억이 난다"고 회고했다.

끝으로 그는 "당시 학교는 2천여명이 다닐 정도로 규모가 컸다"며 "요즘 보기 드물게 우리가족은 4대가 영동초를 다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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