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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 몰랐던 '어재연 형제'와 '신미양요'

충북도, 쌍묘 문화재로 지정예고
형 어재연, 장수면서 육박전까지 하다 전사
동생 재순, 형 도우려 민간인 신분참전 죽음
시신 육지운구되자 수십리 달하는 조문행렬
강탈됐던 '수자기' 9년전 대여형식 국내반입

  • 웹출고시간2014.07.14 19:25:14
  • 최종수정2014.07.14 19:25:04

어재연, 재순 형제가 영면하고 있는 음성군 대소면 성본리의 쌍묘 모습.

음성군 대소면 성본리에 위치한 어재연(魚在淵·1823∼1871), 어재순(魚在淳·1826∼1871) 형제의 묘가 충북도 기념물로 지정 예고됐다.

도문화재위원회는 현장답사 후 최근 회의를 열고 이같이 결정했다. 예고 30일 동안 뚜렷한 결격 사유가 발생하지 않으면 도기념물로 확정된다.

미국은 평양 대동강에서 발생한 제너널셔면호 사건(1866)에 대한 응징과 조선을 개방할 목적으로 1871년 조선을 침략했다. 이른바 신미양요다.

신미양요의 주력함였던 미국 극동함대의 콜로라도호 모습.

미군은 조선과의 평화협정이 결렬되자 그해 6월 10일(음력 4월 23일) 콜로라도호 등 군함 2척에 승선된 전투대원 6백여명을 앞세우고 강화도 초지진(草芝鎭)을 무력으로 점령했다. 역사상 조미간에 발생한 최초의 전쟁이다.

미군은 여세를 몰아 이튿날 덕진진(德津鎭)을 무혈 점령했고, 마지막으로 광성보(廣城堡) 점령 작전에 나섰다.

광성보에는 진무중군 어재연이 이끄는 조선 수비병 6백여명이 배치돼 있었다. 어재연은 광성보 전투가 있기 8일 전인 6월 3일(음력 4월 16일) 진무중군에 임명돼 현지에 부임했다.

미군이 점차 다가오자 광성보에는 초대형 '수자기'(帥字旗)가 내걸렸고, 이것은 결사항전을 의미했다.

당시 집권자 흥선대원군은 개방과 통상을 요구하는 미국의 입장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진무사를 시켜 미함선에 보낸 편지를 이렇게 썼다.

'우리나라가 외국과 서로 교통하지 않는 것은 바로 500년 동안 조종(祖宗)이 지켜온 확고한 법으로서 천하가 다 아는 바이며, (…) 이번에 귀국 사신이 협상하려고 하는 문제로 말하면 어떤 일이나 어떤 문제이거나를 막론하고 애초에 협상할 것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높은 관리와 서로 만날 것을 기다리겠습니까.'-<고종실록 8년 4월 17일자>

6월 11일(음력 4월 24일). 미군은 드디어 광성보에 대한 상륙작전을 개시해 해상에서는 함포사격, 지상에서는 야포사격을 전개했다.

육박전을 벌인 광성보의 조선군 모습.

ⓒ 출처: 워키백과· U.S.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미군이 '한 방 쏘면 성이 무너지고 돌이 갈라지는'(용호한록·저자 송근수 추정) 화력을 앞세워 광성보 상륙에 성공했고, 그러면서 조-미군 사이에는 육박전이 발생했다. 황현(黃玹·1855-1910)은 '매천야록'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재연은 분연히 칼을 들고 싸우다가 칼이 부러지자 납으로 된 탄환을 쥐고 적들을 향해 던졌다. (…) 그가 가지고 있던 탄환이 다 떨어지자 적들은 그를 창으로 난자하였지만, 그는 반 발자국도 옮기지 않고 죽었다. 적들은 그의 머리를 베어 갔다.'-<매천야록 제 1권>

어재연과 그의 동생 재순 등을 포함한 순절자 2백40여명의 시신은 그로부터 나흘 뒤인 6월 15일(음력 4월 28일) 흙이 메워진 참호 등에서 발견됐고, 나머지 1백여명은 물가 등에서 익사체로 발견됐다.

'찰주소의 광진보루에 달려가 보니, 보루는 텅 비었고 흙 참호는 모두 메워졌기에, 즉시 마을사람들을 동원하여 흙을 파냈더니 중군 어재연과 그의 친동생 어재순 (…) 등이 피를 흘리고 참호 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그 나머지 여러 시체들은 몸과 머리가 썩어서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가 없었습니다. 광성진별장 박치성의 시체는 조수가 나간 다음 강변에서 드러났는데 인신을 차고 있었으므로 주워서 바칩니다. 별무사 유예준의 시체는 아직 찾지 못하였는데 붙잡혔다는 소문이 있습니다.'-<고종실록 8년 4월 28일자>

이때 어재연의 나이 쉰이 채 안 된 49살이었다. 동생 어재순이 민간인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광성보 전투에 참가한 것은 형제간 우애 단 하나였다.

어재연은 동생 재순이 자신을 걱정해 전장(戰場)까지 찾아오자 다음과 같은 말로 호통, 되돌려 보내려 했다.

'너는 궁향(窮鄕)의 일개 포의(布衣)에 불과한 몸이다. 그러므로 너는 왕사(王事)로 죽는 나와는 다르다. 어찌 빨리 돌아가지 못하겠는가.'-<쌍충집>

그러나 아우 재순은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일에는 臣과 民이 하나입니다. 형님이 사지에 계시는데 의리상 홀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라고 싸우다 형과 일시에 순절했다.

흥선대원군은 어재연 등의 시신이 육지로 돌아오자 다음과 같은 엄포를 놨고, 그러자 한양도성안 조문 행렬이 수십리에 달했다.

'그의 시신이 돌아오자 대원군 은 조정에서 제창하기를, "魚병사의 상여를 맞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모두 천주교인이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온 조정이 출영하여 수레와 말이 수십 리나 줄을 이었다. 이때 노인들은 순조 계유년(1813)에 충장공 정시(鄭蓍)의 장례를 치른 이후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하였다. 재연 의 아우 재순도 백의종군하여 형과 함께 전사하였으므로 그에게도 이조참의를 증직하였다.'-<매천야록 제 1권>

정시는 조선후기 홍경래난 때 '내 명이 다하기 전에는 항복할 수 없다. 속히 나를 죽여라'라며 반란군을 꾸짖다가 칼에 맞아 죽은 인물이다.

당시 미군이 노획해 함상에 걸어둔 어재연 수자기 모습. '帥' 자가 보인다.

ⓒ 출처: 한국근현대사사전.
한편 어재연이 지휘에 사용하던 군기인 '수자기'는 미군에 의해 전리품으로 강탈된 후 미국 아나폴리스에 있는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돼 왔다. 이후 한미 양국이 장기 대여에 합의, 지난 2007년 국내로 들어와 현재 강화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가로·세로 각각 4.5m 크기의 수자기는 삼베 또는 광목으로 추정되는 재질로 희귀한 군사 자료일 뿐만 아니라 근세사의 중요한 역사·학술적 의미를 지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조혁연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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