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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명절에 본 전화문화 변천사

"구한말 공중전화, 월2회 휴무했다"
초기 '덕율풍''전어기' 등 다양하게 불려
청주는 1910년 전화통화 업무 처음 시작
'삐삐' 나오자 숫자 은어도 다양하게 등장
충주 새한미디어, 씨티폰 실패 공중분해

  • 웹출고시간2013.09.16 17:09:20
  • 최종수정2013.09.16 17:10:40

편집자 주

과거 추석이 되면 가족들이 송편이 차려진 상에 둘러앉아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나 지금의 청소년들은 대화대신 각자의 휴대폰으로 게임에 몰두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사찰에서도 휴대전화로 수다를 떨어야 하고, 예배시간에 진동음이 올리면 전화를 받기위해 밖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다. 휴대전화는 이제 생활의 편리와 오락을 넘어 '신종교'가 된 것일까.

자료에 따르면 하루 중에는 퇴근무렵, 1년 중에는 명절이나 첫눈 올 때 전화 통화량이 가장 많다. 추석 명절을 맞아 우리나라 전화문화 변천사를 살펴본다. 그 변천사에는 충북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전화기 처음 본 사람은 유길준

오픈 국어사전에는 이미 '전화하는 인간'을 의미하는 호모텔레포니쿠스(Homo telephonicus)라는 낱말이 올라와 있다.

사전은 그 설명으로 '휴대전화가 없으면 불안을 느낄 정도로 항상 휴대전화를 지니고 다녀야 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전화에 빗대어 표현한 용어'라고 적었다.

우리나라에서 전화의 존재를 처음 목격한 사람은 유길준(兪吉濬, 1856∼1914)이다. 그는 서구문물을 견학하고 적은 '서유견문'에서 전화기를 '遠語機'(원어기)라고 표현했다.

'먼곳에 있는 사람과 말을 할 수 있는 기계'라는 뜻으로, 이때가 1885년이다. 전화기는 1893년 국내에 전화기가 처음 들어왔으나 실제 통화는 1898년 궁중에서 이뤄진 것으로 나타난다.

당시에는 이를 'telephone'(전화기)의 한자음을 따서 '덕율풍'(德津風) '덕진풍' 또는 '전어기'(傳語機)라고 불렀다. '津'은 '율' 또는 '진'으로도 읽을 수 있다. 황성신문은 '전어기'로 표현했다.

국내 최초로 개발된 시내용 공중전화기 모습이다. 일명 체신1호.

.

'芙蘭克麟이 風箏 造하야 電氣를 發明한 後에 電氣線과 傳語機가 生하야 萬里信息을 一瞬通達하며…'-<1898년 10월 12일자>

인용문 중 '芙蘭克麟'(부란극린)은 피뢰침을 발명한 미국 프랭크린, '風箏'(풍쟁)는 연을 지칭하고 있다. 풀어쓰면 '프랭크린이 연을 만들어 전기를 발명한 후 전기선과 전화기가 생겨나 아주 먼곳의 소식을 일순간에 전달하여…' 정도가 된다.

그러나 신문명의 상징인 전화가 조선사회에서 무조건 환영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성리학적 사고의 사람들은 상당수 반대했다.

'"당시 일반인들은 전기바람은 비구름을 말리고 땅의 덕진풍은 땅 위의 물을 말린다"며 전기과 전화를 싸잡아 경원시했다.'-<강준만의 '한국 근대가 산책3>

◇초기에는 네번 절하고 전화받아

신하가 전화를 받는 모습은 아예 코미디에 가까왔다. 작고한 언론인 이규태(조선일보) 씨는 이렇게 서술한 바 있다.

'궁내부에서 전화할 일이 있으면 절차는 더 복잡해진다. 벗어 놓았던 관복, 관목, 관대로 정장을 하고 전화를 향해 큰절을 네 번하고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엎드려서 수화기에 대화를 했던 것이다.'

최초의 시외전화닌 경인간 전화가 개통될 무렵으로 초기에는 상투든 남자들이 이 일을 맡았다.

우리나라 유선전화는 자석식, 공전식, 다이얼식, 버튼식(현재) 등의 순으로 발전했다. 자석식은 자석발전기를 손으로 돌려 교환원을 호출하는 것을, 공전식(1908년)은 좀 진화대 수화기를 들면 교환원과 연결되는 전화기를 말한다.

충북에 유선전화가 첫선을 보인 것은 '공전식' 단계부터인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인 오오꾸마 쇼지(大熊春峰)가 쓴 '청주읍지'는 △1908년 11월에 전신(전보)사무 개시 △1910년 9월에 전화통화사무 개시 △1911년 12월 시내통화 교환업무 개시라고 적었다.

전화 교환원은 초기에는 상투를 튼 남성들이 맡았다. 그러나 '한성전화소'에서 여성 교환원을 양성하면서 빠르게 남성을 대체했다.

그러나 교환원은 종종 '성질급한 집단'의 분풀이 대상이 됐다. 그리고 최소 1940년대 말까지도 얕잡아보는 표현인 '교환양'으로 불려진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는 이렇게 적었다.

'군경측에서 전화가 빨리 안 나온다고 전화 교환대까지 뛰쳐와서 교환양을 구타하는 일이 빈번하여 교환양들이 전전긍긍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 체신, 국방, 내무장관이 여하한 인물을 막론하고 무단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전화 교환실내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구두 합의를 보았다고 한다.'-<1949년 11월 20일자>

◇관리인이 공중전화 항상 지키기도

자석식 전화기 모습으로 우측 손잡이를 돌려 교환원을 불렀다.

국가기록원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 길가에 공중전화가 최초로 설치된 것은 1900년대이었다. 당시 공중전화는 자석식 방식으로 핸들을 돌려 교환원을 부른 후 교환원에게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려준 후 원하는 상대방과 통화를 하는 방식이었다.

그 이후에는 공중전화 옆에 관리인이 항상 자리를 지키면서 공중전화를 이용할 사람으로부터 요금을 받고 상대방과 통화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공중전화 이용시간은 오전 8시부터 오후 9시로 정해놓고 관리인이 월2회 '공중전화 휴무일'도 지정할 수 있었다.

일명 DDD로 불리는 장거리 자동공중전화는 1971년 서울-부산간 처음으로 개통됐다. 경향신문은 그때의 흥분을 이렇게 적었다.

'다이얼, 신호가 간다, 찰칵!. "여보세요, 거기 부산 경향신문 지사지요, 여기 서울 본사입니다." 고속도로를 뚫어 1일 생활권이라고 한 서울-부산은 이제 장거리 자동전화개통으로 통신망의 같은 맥박권을 이룬 것입니다.-<1971년 3월 30일자>

그러나 공중전화가 다량 설치되면서 그 주변에서는 통화시간을 둘러싸고 다툼이 자주 일어났다. 동아일보는 '공중전화 오래 쓴다 시비, 두 여자 난투극' 제목의 기사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차례를 기다리던 한모부인이 "무슨 통화를 그렇게 오래 하느냐, 빨리 끝내라"고 재촉을 하자 김양은 한모부인에게 "당신이 뭔데 남의 전화까지 상관하느냐"고 받았고, 한모부인은 김양에게 "공중전화가 너의 전화냐, 뒷사람도 생각해야 하지 않느냐"고 나무라며 서로 치고받는 사태로 발전했다'-<1982년 11월 10일자>

◇가짜 카폰차량 쌍안테나 달고 허세



일명 '삐삐'로 불렸던 무선호출기 모습으로 다양한 숫자 은어 문화를 낳았다.

1980년대는 우리나라 전화변천사에 있어 대변혁기로 불리고 있다. '유선' 일변도에서 '무선'의 시대가 도래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 첫문은 일명 '삐삐'로 불렸던 무선호출기가 열었다.

무선호출기는 통화를 원하는 상대방에게 자기 전화번호를 호출기에 찍어주는 방식을 하고 있다. 이때 전화번호 뒤에는 다양한 형태의 '숫자은어'가 첨부됐다.

가령 '8282'는 빨리 와라 혹은 빨리 전화해라, '7676'은 약속 장소에 곧 도착한다, '2626' 집에서 출발, '1212'(홀짝홀짝)은 술마시고 싶다 등을 의미했다.

카폰은 크기가 커 일명 '벽돌폰'이라고 불렸고, 허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984년에는 차안의 무선 전화기로 별도의 안테나가 필요한 '카폰'이 등장했다. 그러나 카폰은 기기값이 너무 비싸면서 이용자가 많지 않았다. 대신 이른바 '가짜 카폰 안테나'를 단 차량도 매우 많았다. 특히 쌍 안테나를 달고 허세를 부리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1990년대 후반에는 비운의 전화기로 불리는 '씨티폰'(CT-2)이 등장했다. 'Cordless Telephone', 즉 선없는 전화기라는 뜻인 시티폰은 발신전용 무선전화기였다.

때문에 사람들은 이동 중에 삐삐에 전화번호가 찍히면 이 시티폰으로 전화를 걸고는 했다. 씨티폰은 한때 각광을 받았으나 개인휴대통신기인 지금의 휴대폰이 등장하면서 단기간에 시장에서 사라졌다.

이 과정에서 충주에 본사를 둔 '새한미디어'도 공중분해됐다. 구 충주비료공장에 터를 잡은 새한미디어는 국내는 물론 비디오, 오디오 테이프 시장을 석권했다.

한때 씨티폰 사업에 참여했던 새한미디어 구충주공장 모습이다.

이같은 성장세를 바탕으로 삐삐와 씨티폰 사업 투자를 했으나 시장이 소멸되면서 새한미디어도 워크아웃에 들어간 끝에 지금은 GS그룹에 인수됐다.

대신 씨티폰을 무너뜨린 국내 휴대폰은 스마트폰으로 변신하는 등 혁신과 도약을 거듭하고 있다.

/ 조혁연 대기자

사진제공: kt정보통신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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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로 개발된 시내용 공중전화기 모습이다. 일명 체신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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