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최근의 연구 성과는 제조법을 제외한 나머지에 성격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라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영남대 박장호 씨가 논문 '원삼국시대의 동물대구의 전개와 의미'에서 청주 봉명동 유물을 지목, "착장할 때 고리를 묶었던 노끈이 함께 출토됐다"며 "이는 마형대구가 장식품이 아닌 실생활에 사용됐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밖에 "세종시 용암리 가마골 유적에서 발견된 마형대구 고리부에는 철로 수리한 흔적이 남아 있다"며 "장식품이었다면 굳이 다른 금속재료로 수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밝혔다.
또 다른 궁금증은 과연 무덤에 묻힌 피장자가 마형대구를 허리에 찬 채로 묻혔는가, 아니면 허리에 차지 않고 별도로 부장됐는가 여부이다.
종래에는 허리에 착장했다는 설이 우세했으나 박 씨는 이를 부인했다.
그는 "상당수 마형대구가 헝겊조각의 일종인 포에 쌓인 채 발굴되고 있다"며 "만약 피장자가 착장을 했다면 논리상 포에 쌓일 수가 없다"고 밝혔다.
지역과 관련해 가장 큰 궁금점은 왜 충청도의 마형대구가 4세기쯤 역사에서 사라졌는가 하는 점이다. 현재 마형대구는 전국에서 130개가 발굴된 가운데 출토지역에 따라 동남권, 중서부권, 상주권 등으로 나눠지고 있다.
청주 봉명동, 청원 오창 송대리, 충주 금릉동, 천안 청당동, 세종시 가마골 등은 중서부권으로 분류되고 있다. 그러나 충청도 마형대구는 편년상 4세기 것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출토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일부 사학자는 천안에서 마형대구가 중국 청자와 함께 출토된 점을 들어 "중국계 유물로 대체됐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박씨는 그것보다는 마형대구가 사라지는 때와 마한이 백제에 의해 멸망되는 시기가 거의 같음을 주목했다.
그는 "마한은 서기 369년 백제에 의해 멸망했는데 마형대구가 사라진 시기도 거의 같다"고 밝혔다. 그의 주장이 맞다면 충청도 지역의 마형대구는 초기 백제가 아닌, 마한의 문화유산임을 의미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충북대 성정용(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몇해전 충주 금릉동에서 마형대구가 출토된 점을 들어 "남한강수계인 충주까지가 마한의 강역(영토)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같은 흐름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마형대구가 북쪽(시베리아)에서 유입됐는지, 아니면 중국으로부터 전파됐는지는 아직 명쾌히 규명되지 않고 있다.
반면 세종시 용암리 가마골에서 발굴된 마형대구가 일본 혼슈 것과 매우 유사한 점이 또 다른 방향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와 관련, 당시 마형대구를 만들던 사람들이 마한이 멸망하자 일본으로 도일(渡日)한 것이 아니냐는 추정이 강하게 제기돼 있는 상태다.
/ 조혁연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