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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가 있는 충북역사기행 - 청풍 한벽루

"그 빼어난 경치, 만분의 일도 그려내지 못했다"
김창협 "바람결 물소리는 나의 거문고"
이산해 "아름다운 경치 호서 제일이다"
권상하·권섭 등 유유자적 노론의 공간
진경산수화의 단골 소재 겸재 등 찾아

  • 웹출고시간2011.10.19 15:42:47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충주댐 수몰전의 한벽루 모습이다. 풍광이 매우 빼어났음을 알 수 있다.

ⓒ 자료= 청풍관광마을 홈페이지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는 혼동되는 면이 있다. 한자가 둘의 차이점을 어느 정도 설명해 주고 있다. 누각 할 때의 '다락樓' 자는 마치 이층집 모습을 하고 있다. 바로 누각은 1층은 기둥만 세우고 2층에 마루를 깐 건축물로, 과거 관아에서 부속 건물로 짓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비해 정자는 규모가 누각보다 작으면서 1층으로만 지어졌다. 과거 선비 개인의 피서나 음풍농월 장소로 주로 이용됐다.

누각과 정자는 다르면서 같은 점이 있다. 바로 벽과 문이 없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 조선초기 문신 손순효(孫舜孝·1427∼1497)는 물재집에 '樓虛則能納萬景 心虛則能容衆物'이라는 문장을 남겼다.

'누각은 비어 있어야 주변의 많은 경치를 불러들일 수 있고, 마음도 비워 있어야 여러 사물을 포용할 수 있다'라는 뜻이다.

우리 선조들은 취경(取景) 즉, 경치를 불러들이기 위해 누정(樓亭)에 벽과 문을 설치하지 않았다. 이는 '마음을 비워야 선행을 쌓을 수 있다'는 불교 선사상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청풍과 한벽루의 역사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한벽루 표현 부분이다. '객관 동쪽에 있는데 큰 강을 굽어보고 있다'고 적었다.

충숙왕 4년(1317) 우리고장 청풍현 출신의 '청공'(淸恭) 스님이 왕의 스승(王師)이 됐다. 바로 한벽루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건물로, 이때 청풍도 '현'(縣)에서 군(郡)으로 승격됐다.

'본래 고구려의 사숙이현(沙熟伊縣)으로 신라 경덕왕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내제군(柰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 9년에 내속하였으며 뒤에 감무를 두었다. 충숙왕 4년에 현의 승려 청공(淸恭)이 왕사가 됨으로 인하여 올려 지군사(知郡事)로 삼았다. 월악(月嶽)이 있고 풍혈이 있다.'-<고려사 지리지 충주목 편>

한벽루는 조선시대 들어서는 태조, 인조, 고종 등 세 차례 중수됐다. 1972년에는 대홍수로 쓰러진 바 있고, 1983년 충주댐이 완공되면서는 본래 있던 청풍면 읍내리에서 지금의 청풍문화재단지내로 이전됐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은 한벽루에 대해 '객관 동쪽에 있고 큰 강을 굽어보고 있다'(在客館東俯臨大江)라고 표현했다. <그림 참조>

이밖에 명성왕후 김씨는 조선 18대 임금인 현종의 정비이면서 숙종의 어머니가 된다. 그의 고향이 바로 청풍이다.

이때 청풍의 행정 지위가 '군'에서 '도호부'(일종의 특별시)로 승격된다. 왕비의 '관향'(貫鄕)이라는 이유에서 였다. 청풍도호부는 1895년까지 유지됐다.

◇건축 특징

누각 본채에 작은 누각이 덧대어 있는 고건축을 '익랑'(翼廊) 누각이라고 한다. 청풍 한벽루(寒碧樓), 남원 광한루, 밀양 영남루를 우리나라 '3대 익랑누각'이라고 부르고 있다.

조선후기 북인의 영수였던 이산해(李山海·1538~1609)는 이중 제천 청풍의 한벽루를 '아름다운 경치는 호서 제일'(形勝湖西第一洲)이라고 표현했다.

건물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4칸으로, 덤벙주초(柱礎)와 엔타시스 기둥이 눈에 띄고 있다.

덤벙주초는 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을 다듬지 않고, 자연석 그대로를 사용한 것을 말한다. 엔타시스는 이른바 배흘림 기법으로, 기둥 중간 부분이 배(腹)처럼 부른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 '지승'이라는 지도의 한벽루 모습이다. 지붕이 3개로 그려져 있다.

이밖에 한벽루 본루의 경우 익공(翼工)이 이중으로 돼 있는 점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익공은 기둥과 지붕을 연결하는 부분의 결구를 말한다.

전문가들은 "조선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과정의 양식적인 특징으로 장식성이 강조된다"고 밝히고 있다.

누각에는 우암 송시열, 곡운 김수증의 편액과 추사 김정희가 '淸風寒碧樓'라 명(銘)한 액자가 걸려 있다.

◇한벽루를 노래한 문인들

앞서 언급한 송시열, 김정희 외에 하륜, 정인지, 이황, 김창협 등 조선시대 문인 상당수가 한벽루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한벽루를 시의 제목이나 배경으로 가장 많이 삼은 인물은 김창협(金昌協·1651∼1708)으로, 무려 11번에 달하고 있다.

시 대부분은 그가 청풍부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 지은 것으로, 자연에 몰입돼 있는 그의 심리 상태가 잘 드러나 있다.

'밤안개 자욱한 금병산 보소 / 그림자 깊은 강 빠져 들어가 / 흐르는 물결 함께 가지 않으니 / 도사의 속마음과 흡사하여라 / 초라한 복건 하나 머리에 쓰고 / 사방을 둘러보며 누굴 찾는지 / 구름 가의 밝은 달 저게 내 촛불 / 바람결 물소리는 나의 거문고 / '-<농압집 제 3권>

한벽루의 터줏대감은 아무래도 노론계 권상하(權尙夏·1641∼1721)와 그의 친조카 옥소 권섭(權燮·1671∼1759)일 것이다.

권상하는 스승 우암이 예송논쟁 때 유배당하는 것으로 보고 청풍으로 낙향, 일체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며 유유자적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한벽루 일대의 가을 풍광을 '한 피리 소리 들리는 빈 강의 밤 / 千山에 낙엽지는 가을이라 / 외로운 배 어디서 온 나그네 / 흰 마름 모래톱에서 밧줄을 매네'라고 읊었다.

경화벌열(京華閥閱)이었던 권섭은 송시열에게 사약이 내려지는 것을 보고 역시 낙향을 결심한다. 경화벌열은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가 출세를 한 가문을 일컫는다.

그러나 낙향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장남 진성(震性)이 임인옥사에 연루돼 처형당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때 심정을 자서전격인 자술년기에서 '아이들과 손자들을 이끌고 머리를 들고 하늘에 물었으나 하늘은 대답이 없었다'(携持兒孫 昻首問天而天不應矣)라고 적었다.

◇한벽루, 명승을 그리다

호서 제일의 누각이라는 말을 들었던 한벽루는 당연히 그림의 주요 소재가 됐다. 한벽루를 진경산수식으로 그린 화가로는 겸재 정선, 윤제홍, 이방운 등이 있다.

이중 청풍부사를 지내기도 했던 윤제홍(尹濟弘·1764∼?)은 다음과 같은 시문을 그림 속에 남겼다.

"내가 이 사계절을 한벽루에서 보냈지만, 그 경치의 만분의 일도 그려내지 못했다. 진경을 그린다는 것이 이다지도 어렵단 말인가."

반면 이방운(李昉運·1761∼?)은 문인화가는 아니었지만 당시 청풍부사 안숙의 부탁을 받고 '금병산도'를 남겼다.

조선후기 이방운의 그림이다. 그림 제목은 '금병산'이지만 한벽루가 더 상세히 묘사돼 있다. 19세기 초기의 작품이다.

이 그림은 금병산을 주제로 한 그림이나, 오히려 한벽루가 눈에 더 크게 들어온다. 근경에는 한벽루, 중경에는 강문, 원경에는 금병산을 배치했다.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선비들이 한벽루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고, 돛단배는 돛이 한껏 부풀어 있으며, 건너편 강변으로는 목동이 지나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 그림을 심사성, 강세황, 김홍도의 그림 기법을 절충적으로 구사했다고 평하고 있다. <그림 참조>

붓을 들지 않았지만 조선전기 문신 정인지는 일대 풍광을 "복사꽃 시골길은 신선의 지경이요, 단풍잎 시내와 산은 금수(錦繡)의 병풍이다"라고 그림같이 묘사했다.

또 비슷한 시기의 경세가 하륜은 지명과 풍광을 절묘히 비교했다.

"청풍(淸風)의 칭호와 한벽(寒碧)의 이름은 듣기만 해도 오히려 사람으로 하여금 뼈가 서늘하게 한다. 훗날 혹 능히 적송자(赤松子)와 함께 놀 소원을 이루어 다시 죽령 길을 지나게 된다면…"-<신증동국여지승람>

/ 조혁연 대기자

자료도움: 충북대 사학과, 제천문화원, 한국학 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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