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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빙 돌면서 불어온다', 구풍으로 명명

실록으로 본 조선시대 태풍
최대 피해는 효종 때 발생 1천여명 사망
신숙주도 일본에서 돌아오다 죽을 고비
선조 "하늘에 仁이 있는가" 탄식하기도

  • 웹출고시간2012.09.17 19:14:29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조선시대에는 태풍을 '구풍'(風+具風)이라고 불렀고, 이로 인한 인명피해는 최대 1천여명에 이르렀던 적도 있던 것으로 나타났다.

한자 문화권에서 구풍은 '사방의 바람을 빙빙 돌리면서 불어온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키워드(열쇠말) 방법으로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한 결과, 현재 대중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태풍'(颱風)이라는 표현은 단 한 번도 관찰되지 않았다.

실록 탈초(정자체로 다시 씀)의 문장에서 세조 8년(1462)에 '颱風'이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으로 나타났으나 원문을 확인 결과, '구풍'으로 표기돼 있다.

중국에서도 '颱風'이라는 표현이 처음 사용된 것은 이보다 훨씬 후대인, 1634년의 토풍지(土風志)라는 고문헌에서 였다. 이때의 태풍이 영어 '타이푼'(typhoon)이 됐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효종실록에는 '구풍(태풍)으로 인해 1천명이 익사했다'(세로선)는 기록이 등장한다.

이에 비해 '구풍'이라는 표현은 총 41건이 노출됐다. 역대 왕별로 살펴보면, 태조 1,태종 2, 세종 2, 세조 2, 성종 4, 명종 2, 선조 6, 광해군 1, 인조 1, 효종 3, 현종 2, 영조 2, 고종 11건 등으로, 선조 때 가장 많았다.

'구풍' 외에 '대풍'(大風)이라는 표현도 상당수 등장하나, 겨울철에 분 사나운 바람도 '대풍'으로 적은 경우가 많아 검토 대상에서 제외했다.

구풍이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한 시기인 태조 때의 실록은 '반양산(半洋山)에 이르러 회오리바람이 크게 일어나서 두 객선(客船)은 모두 침몰하였다'라고 적었다. 인용문 중 반양산은 발해만 인근에 위치하고 있다.

태풍으로 인한 최대 인명피해는 효종 7년(1656)에 발행한 '1천여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다음 인용문은 당시 병조좌랑 최유지라는 인물이 태풍 피해를 보고하는 내용이다.

'옛날부터 어느 시대인들 재해가 없었겠습니까마는 오늘날처럼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천둥과 우박이 하늘을 뒤흔들어 죽거나 다친 이가 1백여 명이고 태풍이 바다를 흔들어 배가 뒤집혀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1천여 명이었습니다(그림 세로선).'

이밖에 태풍과 관련된 흥미로운 사건으로는 △신숙주가 사신으로 갔다고 일본에서 돌아오다 태풍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겼고 △선조 때는 태풍으로 인해 전함 수백척이 파괴됐다.

세조실록은 전자에 대해 '우리 나라로 향할 때 구풍을 만나서 여럿이 모두 얼굴 빛이 변하였으나, 신숙주는 신색(神色)이 태연자약하여 말하기를, '장부(丈夫)가 사방(四方)을 원유(遠遊)함에…'라고 하였다'라고 서술했다.

후자에 대해 선조실록은 '해상에서 일어난 태풍의 변고는 전고에 없었던 일로 하룻밤 사이에 수백 척의 전함(戰艦)을 풍랑 속에 몰아넣어 전복 파괴시키고 수백 명의 인명을 익사시켰다. 그러니 하늘이 과연 인애(仁愛)한 것인지 아니면 불인(不仁)한 것인지 모르겠다'라고 적었다.

한편 중-일간 무역을 하던 양국의 상인들도 제주도 근해에서 태풍 피해를 자주 입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음은 구출된 중국 상인의 자백이다.

'우리는 모두 남경 소주(蘇州) 백성들로서 일본에 무역하러 갔다가 이제 막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구풍을 만나 바다 가운데에서 배가 부서졌다. 그 결과 1백 85인이 빠져 죽고 다행히 살아남은 자는 겨우 28인인데, 침몰된 재화가 엄청나게 많다.'-<선조실록>

/ 조혁연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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