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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무의 새충청 문화기행 - 청주읍성 따라 돌기

일제가 할퀸 천년고도 청주의 수문장
도시근대화 미명 4대문, 성벽 모두 헐어
청남문 비롯 4대문만이라도 복원해야
임란때 탈환 육전 최초로 승리 거둔 곳
성 네모서리 둥글게 처리, 삼각지 형성
전봇대 옮기다가 현무문 근처서 성돌 출토
성벽 자체가 바로 인도로 변해 모습 유추

  • 웹출고시간2010.09.26 19:40:46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천년고도 청주를 알려주는 징표는 역시 유적, 유물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청주의 대표적 유적, 유물로는 흥덕사지, 상당산성, 부모산성, 정북동 토성, 용두사지철당간 등을 꼽게 된다. 만약 여기에 청주읍성, 남석교 등을 보탠다면 금상첨화요 화룡점정(畵龍點睛)이다. 그렇게만 됐더라면 굳이 청주가 천년고도라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아도 된다. 고즈넉한 역사도시의 면모를 몸으로 말해주기 때문이다. 청주읍성은 역사도시의 정체성을 입증해 줄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한 관광수입도 꽤 기대할 만한 일이었다. 조선 명종 때 성리학자 성제원(成悌元)과 청주 관기 춘절(春節)의 로맨스가 성돌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청주목사를 지낸 이율곡의 학식과 품격이 학문과 예술의 고장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을 것이다.

1913년 충동에서 남주동쪽으로 바라본 청주읍

그러나 역사에서는 안타깝게도 '만약에...'라는 가정법 과거가 성립하지 않는다. 역사는 필연의 결과만을 따지기 때문이다. "만약에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했더라면 오늘날 만주 벌판이 다 우리 땅이 되었을 텐데..."라는 발상과 마찬가지 논리이다. 둘레 1.7km, 높이 4~5m에 달하는 청주읍성은 언제 축성되었는지 정확하지 않다. 다만 통일신라 신문왕 9년(689)에 서원경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서원경성 치소(治所 · 행정의 중심지)에 관해서는 현재 청주읍성설, 우암산토성설, 상당산성설로 나뉘어 있다. 만약에 청주읍성이 서원경의 치소였다면 그 축성연대가 1천3백 여 년 전 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이 아득한 역사는 일제가 인정사정없이 밟아 그 상한선을 알 수 없게 됐다. 일제는 1911~1914년 사이에 '시가지 개정'이라는 미명아래 청주읍성을 헐어 하수구 쌓는데 사용하였다. 일제에 의한 문화재 침탈과 파괴는 한 두 가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청주읍성의 경우 대문하나조차 남김없이 파괴한 것은 과거 임진왜란 당시 청주성 전투에서 패퇴한데 대한 앙가픔의 심리가 다분히 작용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우리는 한동안 청주읍성의 구조조차도 모르고 살아왔는데 천만다행으로 전남 구례 운조루에서 지난 1980년 대 초에 '청주읍성도'가 발견됨으로써 청주읍성의 면면을 알아내게 되었다. 읍성은 남북으로 긴 장방형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청남문(남문)에서 현무문(북문)으로 큰 길이 직선으로 뚫려있고 벽인문(동문)과 청추문(서문) 사이는 어긋나는 통로로 연결돼 있다. 동서축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청주목 관아가, 남쪽으로는 현 중앙공원인 충청병영이 머리를 맞대고 있다. 읍성 안에는 통군루, 공북루, 표충사, 망선루 및 여러 채의 객사가 있었는데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청주목 동헌인 청녕각(淸寧閣)과 충청병마절도사영문 뿐이다.

망선루 전경

몇 년 전, 구 청주경찰서 인근에서 복합영화상영관을 짓다 객사 터의 석렬(石列)이 발견되었으나 복원되지 못하고 묻혔으며, 구 자유극장 쪽으로 향하는 남사로 일대에서 객사로 추정되는 큰 건물이 확인되었으나 이 역시 도로확포장으로 해체되었다. 대들보, 서까래, 도리 등 건축자재로 보아 예사건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는 선술집이 잇달아 들어서 립스틱 짙게 바른 아가씨들이 나와 "오빠, 한잔하고 가셔..."라며 취객을 유혹하던 곳이다.

1910년대 청주읍성 남문

4대문 중 가장 큰 문인 청남문(淸南門)은 구한말 때 찍은 사진 한 장이 전해지며 그 모습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무사석으로 기단을 쌓아올렸고 출입구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 형태를 취하고 있다. 2층 누각은 팔작집으로 '淸南門' 현판이 걸려 있다.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성문을 통과하는 모습과 2층 누각에 올라 휴식을 취하는 장면이 찍혀 있다. 청주약국 앞에 있던 주 출입문으로 이 문을 지나 우리 은행 쪽으로 직진하다 여기서 서진을 하며 충청병마절도사영문을 통과하여 충청병영에 이르게 된다. 효종 때, 충남 해미읍성(海美邑城)에 있던 충청병영이 청주로 옮아왔다. 임란 후 국방체계가 바뀌면서 충청병영이 이전한 것이다. 해로보다 육로의 중요성이 강조된 까닭이다.

신한은행 앞에 비교적 큰 광장이 조성돼 있는 것은 청남문 앞에 옹성(甕城)이 있었기 때문이다. 옹성이란 독을 세로방향으로 반으로 쪼갠 것과 같은 형태의 성을 말한다. 성문 앞에 이를 배치하여 적병의 침투에 효과적으로 대응했다. 적병이 옹성을 도는 사이 성벽에서 대각선으로 적병을 공격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철옹성(鐵甕城)이란 말은 바로 옹성에서 유래된 말이다. 무심천은 지금의 물길보다 훨씬 안쪽으로 흘렀다. 육거리 재래시장, 제일교회 앞을 굽이쳐 흐르며 서문시장으로 흘렀다. 따라서 무심천은 청주읍성의 자연적 해자(垓字 · 적병의 침투를 막기 위해 성 둘레에 파놓은 연못)역할을 했다.

청주 읍성도

청주읍성은 임란 당시에 왜군에 빼앗겼다가 탈환되었는데 의병, 승병, 관군이 합동작전을 편 청주성 탈환은 육지에서의 첫 승전이다. 이인좌의 난 때는 반군이 상여에 무기를 감추고 청남문을 통과했으니 한국판 '트로이의 목마'같은 작전이었다. 이때 패장(牌將) 양덕부(梁德溥)가 반군과 내통하여 읍성문을 열어주었다. 읍성 안에서는 청주목사 박당과 충청병마절도사 이봉상(李鳳祥) 등이 회식을 하고 있었다. 이 때 반군과 내통한 관기 월례(月禮)는 자꾸 술을 따라주며 크게 취하게 하였다. 영장(營將) 남연년(南延年), 비장(裨將) 홍림(洪霖) 등이 병사(兵使) 이봉상과 함께 투항을 거부하자 반군은 이들을 처형했다. 홍림의 애첩인 관기 해월(海月)은 그때 홍림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해월은 아이가 큰 다음 자결하였다. 난이 평정된 후인 영조 7년에 읍성 북쪽에 삼충사(三忠祠)를 지어 이들의 충절을 기렸는데 영조 12년에 사액되어 표충사(表忠祠)로 이름을 바꾸고 1939년에 도시계획에 따라 수동, 우암산 기슭으로 이전하였다. 표충사에는 해월의 열녀각도 있다. 이인좌의 난은 소론이 노론을 몰아내기 위한 반란이었으나 관군에 바로 진압되었다. 청주지방에서는 신천영이 참여했기 때문에 흔히 '이인좌 · 신천영의 난'으로 불린다.

성 돌이는 왼쪽으로 돌건, 오른쪽으로 돌건 답사자의 자유이나 일반적으로 시계방향으로 돈다. 고창읍성에서는 윤달에 성을 돌면 극락왕생한다는 속설이 전해진다. 성 돌이가 민속과 결합한 모습인데 이런 풍경은 전국 곳곳에 남아 있다. 청주읍성 밖 남쪽에는 아침, 저녁으로 열리던 상설시장인 '저자시'가 있었다. 남사로가 확장되기 이전에는 중앙공원 앞에 떡 전이 있었는데 이는 '저자시'의 흔적이다. 사람들은 흔히 '제작거리'라고 부르는데 이는 '저자시'의 사투리다.

성벽은 헐렸으나 성벽 자체가 바로 인도로 변해 청주읍성의 모습을 유추해볼 수 있다. 현재 인도를 따라 지은 건물 바깥선이 성벽 안쪽선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성벽 모서리는 직각으로 꺾이는 것이 아니라 둥글게 돌아갔다. 성벽이 헐린 후 간선도로가 직선으로 나, 그 직선과 곡선사이의 자투리땅에 삼각지가 형성됐다. 읍성의 네 귀퉁이에 삼각지가 그대로 남아 있다. 청남문 남서쪽 모서리에는 염색공장이 있었다. 염색공장 옆으로는 실개천이 흘러 서문시장 쪽으로 이어졌는데 현재에는 복개되어 그 모습을 볼 수 없다. 이 코너에는 선술집 몇 곳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 YMCA 외벽을 따라 북진하는 중앙공원 펜스는 청주읍성을 상징적으로 복원할 수 있는 곳이다. 성돌을 쌓아 벽을 대신하든, 벽화처리를 하든 상징적인 복원이 가능한 구간이다. 서문동 육거리에 이르면 속칭 족발골목 앞에 서문인 청추문(淸秋門) 표석이 있다. 1994년 청주문화사랑 모임에서 4대문 위치에 자연석으로 표석을 설치한 것이다. 비문은 박상일 청주대박물관학예실장이 썼다. 임란 당시 의병장 조헌, 박춘무, 승병장 영규대사가 의병, 승병을 이끌고 청주성 탈환작전을 벌이던 곳이다. 원래 영규대사 비는 청추문 근처에 있었는데 그 후 중앙공원으로 옮겼다. 대한투자신탁 앞 북서쪽 모서리에도 삼각지가 형성돼 있다. 간선도로를 따라 상당공원 쪽으로 걸으면 그 길이 바로 읍성 북벽이다. 구 장글제과 앞에는 북문인 현무문(玄武門)이 있었다. 성안길 북쪽 입구인 이곳엔 도로가 약간 어긋나 있는데 이는 옹성의 약식화 된 형식인 적대(積臺)의 흔적이다.

구 히아신스 예식장 앞에선 10여 년 전, 전봇대를 옮기다 무사석, 돌확 등 성돌 수 톤이 나오기도 했다. 현재도 성돌로 보이는 돌확 등이 도로 가장자리에 있다. 동북쪽 모서리에도 삼각지가 있는데 지하도 입구인 이곳엔 건물이 없고 녹지공간으로 조성돼 있다. 동문은 벽인문(闢寅門)이라 부른다. 벽(闢)은 푸른색, 즉 동쪽을 의미하고 인(寅)도 동쪽을 뜻한다. 성벽은 남진을 하다 구 남궁외과 앞을 지나 수성 아케이트 인근에서 고개를 튼다. 이곳에도 딴 모서리와 마찬가지로 삼각지가 형성돼 있다. 읍성의 남쪽 벽은 청주약국 쪽으로 난 길이다. 청주 삼겹살 음식문화를 형성한 추억의 연탄구이가 이곳에서 시작됐다.

읍성의 복원하자면 토지매입 등에 천문학적인 예산이 들어 거의 불가능한 과제로 보고 있다. 그러나 뜻만 있다면 4대문, 아니 청남문 만이라도 복원이 가능하다는 게 관련학계의 말이다. 또 상가의 벽면을 그래픽으로 처리하는 방안도 있을 것이다. 고도 청주의 진면목은 바로 청주읍성에서 찾아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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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 대한민국헌정회(회장 정대철)는 27일 오후 2시 서울 여의도 국회박물관 대강당에서 '정치선진화를 위한 헌법 개정 대토론회'를 개최한다. 헌정회는 지난해 11월부터 헌법개정위원회를 구성해 개헌의 방향에 대한 연구를 통해 국가 100년 대계 차원의 조문을 만들었다. 이 연구에 이시종 전 충북지사도 참여했다. 정대철 회장은 "정쟁을 해소하는데 개헌의 방향의 초점을 맞췄다"고 설명했다. ◇헌정회가 개헌안 마련에 나서게 된 배경은. "헌정회는 오늘날 국민적 소망인 정치권의 소모적 정쟁 해소와 지방소멸·저출생 등 국가적 위기 상황에 적극 대처하는 것이 시급히 해결해야 할 국가적 과제라는데 인식을 같이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헌법에는 이러한 국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구 유럽처럼 정쟁을 중단시키는 장치인 내각불신임·의회 해산제도 없고, 미국처럼, 정쟁을 중재·조정하는 장치인 국회 상원제도 없다보니, 대통령 임기 5년·국회의원 임기 4년 내내 헌법이 정쟁을 방치 내지 보장해주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따라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헌법개정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에서 헌정회가 헌법개정안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동안 헌법개정은 여러 차례 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