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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무의 새충청 문화기행 - 강경의 문화유산

근대화 물결 속 초침 멎어있는 금강 하구의 포구
한일은행, 남일당 한약방등 근대문화유산 즐비
개발 삽질 비켜간 옛 건물 이젠 관광 명소
기호학파 선비의 맥 금강에 출렁
임리정, 팔괘정엔 선비의 혼이 머물고
비단물결 헤치며 소금배 출항하던 곳
성당 뒤편 암벽에 마애삼존불

  • 웹출고시간2010.11.21 17:49:41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비단강, 금강(錦江)은 소백산맥과 차령산맥의 크고 작은 물줄기를 한데 모아 청주 분지를 거쳐 군산 앞바다로 흘러든다. 청주시를 가로지르는 무심천도 그 상류다. 무심천은 북쪽으로 흐르다 까치내(鵲川) 합수머리에서 미호천 본류와 몸을 섞은 후 돌연 서쪽으로 고개를 틀어 금강 천리길을 재촉한다. 강물은 일사천리로 하구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쉬엄쉬엄 산허리를 끌어 앉으며 숨고르기를 거듭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하천은 거의가 뱀이 기어가는 듯한 사행천(蛇行川)이다. 높은 고개를 오를 때에도 열두 굽이 고갯길이 구절양장(九折羊腸)이듯 강 흐름 또한 이 모양새를 닳았다. 따지고 보면 인생길 역시 사연 많은 굽이 길의 연속 아니던가.

금강은 그 변두리마다 문명의 도장을 꾹꾹 찍어놓았다. 상류인 진천 장관리, 송두리에 석기문화와 청동기 흔적을 남기더니 옥산 소로리 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1만3천 년 전의 볍씨를 토탄층에 묻어놓았고 청원 만수리와 두루봉 일대에서는 자갈돌로 주먹도끼와 팔매돌을 만들어 짐승사냥을 가능케 했다. 이때가 자그만치 50만 년 전이니 인류문화의 호흡은 참으로 유장하다. 뿐만 아니라 금강은 공주 곰나루와 부여 구드레 나루에서 백제문화를 일으켰고 석장리에선 50만 년 전 선사문화를 일구어 냈다. 강은 인간의 삶과 아주 밀착되어 있다. 강물을 먹고, 강물을 따라 이동하며 그 강물을 끌어다 곡식을 자라게 했다. 근대까지 금강은 군산 앞바다의 짠 내음을 내륙 깊숙이 밀어 올리는 숨구멍이었다. 청주 등 내륙지방에서 바다 냄새를 맡으려면 소금배의 종착지인 부강 구들기(鳩坪) 장터에 가야 했다. 여기서 해산물은 내륙의 곡식과 맞바꾸어 졌다.

대개 쌀 한말과 소금 한 가마니를 교환했고 그렇게 흥정을 마친 소금과 비린 자반은 보부상에 의해 수레너미 고개를 넘어 청주로, 열고개나 염티를 넘어 문의, 보은방면으로 공급되었다. 부강 구들기 장터에 소금배가 도착하면 개펄장터는 문전성시를 이뤘다. 군산, 강경에서 출발한 소금배는 한 삭(보름)쯤 걸려 부강에 도착했고 내려갈 때는 강물을 따라 살같이 달려 저녁나절에 출발하면 새벽 어스름에 곰나루에 도착했다. 금강엔 충청인 삶의 액체가 끈적끈적하게 녹아 있다. 강물에는 좋은 일만 있는 게 있는 게 아니라 궂은일도 있다. 홍수가 나면 주변의 논밭이 쑥대밭으로 변했다. 장마철 아이들이 미호천에서 불어난 물에 물장구를 치면 어른들은 "갱갱이 놀뫼 갈랴"라며 호통을 쳤다. 청주지방 사투리로 갱갱이는 강경이고 놀뫼는 논산을 일컫는다. 미호천에 익사한 사체가 더러는 금강하구인 논산, 강경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늦가을 강물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곱고 아름답다. 단풍잎 떠가는 강물을 보고 그 정취에 홀려 강물을 따라가다 보니 소금배의 출항지인 강경에 이르렀다.

김주영의 대하소설 '객주'에 자주 등장하는 강경은 근대화의 삽질이 비켜간 듯 초침이 1960년대에 머물러 있다. 내륙의 물화(物貨)와 해산물이 집산하던 강경은 무슨 사연인지 몰라도 근대화를 거부했다. 오래된 한약방, 한민족을 착취하던 일제시대의 은행, 한옥과 양옥양식을 겸비한 천주교회, 조선시대의 서원 등이 혼재되어 '야인시대'의 거리로 그냥 남아 있다. 일부에서는 이 점을 한탄하지만 오히려 구닥다리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점이 장점이 되어 적지 않은 관광인파를 포구로 불러들인다. 강경은 거리마다 우리의 향수를 덕지덕지 뒤집어쓰고 있다. 현대화에 밀려 사라진 골목길도 남아 있고 양철지붕을 한 시장터 방앗간도 옛 모습 그대로다.

일본식 건물도 많고 한옥에다 일본식이나 서양식을 가미한 건물도 시장모퉁이에서 근대사를 말해주는 듯 장승처럼 서있다. 일제의 건축문화가 시장통을 할퀴며 그 찌꺼기를 곳곳에 떨구고 갔지만 그런 아픔도 어찌할 수 없는 역사의 한 부분이다. 강경읍 염천리의 젓갈 시장에서 시내 쪽으로 들어오다 보면 길가에 빨간 벽돌집을 만나게 된다.

홍예문을 갖춘 조선시대의 돌다리 미내다리

조선 영조7년(1731)에 건립된 것으로 바닷물과 민물이 오가는 곳에 세워졌다. 순전히 석재만을 이용한 돌다리이다. 긴 장대석을 쌓아올리고 그 위에 홍예석을 돌려 3개의 무지개 문(홍예문)을 만들었다. 위부분에 멍에석을 얹어 무지개 다리를 만든 지혜가 놀랍다. 3개의 무지개 문은 치장효과 이외에도 배가 돌다리를 통과하기 위해 만들어진 듯하다. 지금은 강경천의 흐름과 방향이 어긋나게 강경천 둔치에 있다. 아마도 강경천의 물길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강경의 이런 근대문화유산으로 보면 전체적으로 상업도시의 풍모를 떠올리게 되나 문화의 거리라든지, 죽림서원, 임리정, 팔괘정 등을 둘러보면 강경이 마냥 상업도시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준엄한 충청도 선비의 기개와 고준한 학문이 금강의 물결을 타고 출렁거린다. 강경 문화의 거리는 황산대교에서 돌산에 이르는 금강주변을 일컬음이다. 자연경관이 뛰어난데다 서원, 정자가 연이어져 있어 고풍스런 맛을 자아낸다. 죽림서원(竹林書院)은 강경 유림의 정신적 지주다. 조광조, 이황, 이이, 성혼, 김장생, 송시열 등 여섯 분을 제향하고 있다. 이이~김장생~송시열은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중심인물이다. 노론의 거두이자 기호학파를 이끈 우암 송시열이 서울과 청주, 그리고 강경을 오가며 후학을 길렀으니 금강은 뱃길이외에도 학문의 통로역할을 한 모양이다.

죽림서원이라는 현판에 걸맞게 서원 일대에는 대나무 숲이 촘촘하다. 대숲에서는 선비의 바람이 일고 그 바람은 산등성이를 타고 서원 위쪽에 있는 임리정(臨履亭)과 팔괘정(八卦亭)으로 불어 닥친다. 임리정은 1626년(인조4년)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1548~1631)이 세운 건물로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다. 원래는 황산정(黃山亭)이었으나 임리정으로 바뀌었다. 임리정 명칭은 시경(詩經)의 여임심연 여리박빙(如臨深淵 如履薄氷) 구절에서 따 온 것이다. 즉 "두려워 하기를 깊은 연못에 임하는 것 같이 하고, 얇은 얼음을 밟는 것 같이 하라"라는 뜻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이 건물은 왼쪽 2칸은 대청이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이다. 고졸한 건물에서는 선비의 글 읽는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강경 시장내에 있는 구 한일은행강경지점 건물

구 한일은행 강경지점 건물이다. 1905년 자본금 50만 환으로 한호농공은행 강경지점으로 설립되었다. 근대화의 과정에서 은행이 생겨나면서 강경의 수많은 객주의 자본금은 은행으로 자리 이동을 한 것이다. 경술국치 후 조선식산은행 강경지점으로 한 민족을 수탈하다가 광복과 더불어 한일은행 강경지점으로, 충청은행 강경지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높이는 2층규모이나 내부공간은 단층으로 확 틔었다. 빨간 벽돌의 외벽은 기둥머리에 장식을 넣어 은행으로서의 권위를 보이게 했다. 한 때는 강경 경기를 좌지우지 하는 돈줄이었으나 지금은 단지 근대문화유산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한옥과 일본건축 양식을 혼합한 구 남일당 한약방

중앙리 88-1번지에 있는 구 남일당 한약방은 한식과 일본식을 겸했다. 지상2층의 목조건물로 1923년에 지은 건물이다. 우진각(牛鎭角:Y자를 거꾸로 놓은 듯한 지붕)지붕으로 한식인데 측면의 비늘판벽이라든지, 미서기 창(옆으로 여는 문) 등은 일본식 체취를 풍긴다. 강경 하시장(下市場) 중심에서 번영을 구가하던 대표적 한약방으로 초창기에는 남일당(南一堂)한약방이라 했으나 건물 주인이 중간에 바뀌면서 연수당 건재 대약방으로 상호가 바뀌었고 현재는 그 후손이 관리하고 있다. 1층에 돌출된 차양지붕, 변화된 툇마루 등이 일본 건축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강경상고(강경산업정보고)의 강당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1931년에 건립한 건물로 처음엔 일본식 건물이었으나 중간에 벽돌집으로 바꾸었다. A자형의 지붕 물매가 이색적이다. 중간까지 급하게 내려온 지붕 물매가 거기서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처마로 이어진다. 강경천에서 300m 정도 제방을 따라 내려가면 무지개 모양의 강경 미내다리(渼奈橋)를 만나게 된다.

우암 송시열이 건립, 후학을 기른 팔괘정

팔괘정은 임리정과 쌍벽을 이루는 정자다. 임리정에서 150m가량 떨어져 있다. 조선 인조 때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건립했다. 퇴계 이황, 율곡 이이를 추모하며 제자들에게 강학하던 곳이다. 송시열은 임리정을 지은 김장생의 제자다. 스승이 강학하던 임리정에서 가까운 곳을 선택하여 팔괘정을 지었다. 스승과 가까이 있고 싶어하는 제자의 마음에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두 정자는 조선시대 정자 건축의 대표적 건물로 꼽힌다. 임리정, 팔괘정에서 금강을 굽어보는 맛이 일품이다. 정자의 툇마루에 앉아 금강 노을을 보노라면 시 한수가 절로 나온다.

강경은 오래된 기독교 문화를 갖고 있다. 사적 제318호로 지정된 나바위 성당은 전북 익산시 화산리에 위치해 있지만 생활권은 강경이다. 파리외방선교회 소속 베르모렐 신부가 1907년에 지은 고색창연한 천주교회다. 한국인의 정서에 맞게 한옥으로 지었으나 그 후 흙벽을 서양식 벽돌로 바꾸는 등 내부를 개조했다. 그러나 지붕은 한옥 기와 그대로이다. 대구 교구장 드망즈 주교는 1912년부터 매월 6월에 화산 정상인 이곳에서 금강을 굽어보며 피정(수련회)을 하였다. 당시 전라도 교회는 대구교구 소속이엇다. 1915년 베르모렐 신부는 주교의 피정을 돕기 위해 정자를 지었는데 드망즈 주교는 이정자를 망금정(望錦亭)이라 이름 붙였다. 금강을 굽어본다는 뜻이다. 망금정 뒤편으로 가면 큰 바위위에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보이는 마애삼존불이 조각되어 있다. 풍파에 깎여 눈여겨보지 않으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다. 지방문화재로 지정할 만한 작품이나 바위에 숨어있어서 그런지 그 진가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처럼 강경은 유교, 불교, 기독교 등 여러 종교가 그 오랜 발자취를 남기며 공존하는 곳이다. 강경은 광천, 곰소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젓갈 시장을 형성하고 있지만 그것은 강경의 겉모습 일뿐이다. 강경의 동맥으로는 이처럼 유구한 역사문화의 강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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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철 헌정회장 "개헌 방향 '정쟁 해소'에 초점"

[충북일보] 대한민국헌정회(회장 정대철)는 27일 오후 2시 서울 여의도 국회박물관 대강당에서 '정치선진화를 위한 헌법 개정 대토론회'를 개최한다. 헌정회는 지난해 11월부터 헌법개정위원회를 구성해 개헌의 방향에 대한 연구를 통해 국가 100년 대계 차원의 조문을 만들었다. 이 연구에 이시종 전 충북지사도 참여했다. 정대철 회장은 "정쟁을 해소하는데 개헌의 방향의 초점을 맞췄다"고 설명했다. ◇헌정회가 개헌안 마련에 나서게 된 배경은. "헌정회는 오늘날 국민적 소망인 정치권의 소모적 정쟁 해소와 지방소멸·저출생 등 국가적 위기 상황에 적극 대처하는 것이 시급히 해결해야 할 국가적 과제라는데 인식을 같이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헌법에는 이러한 국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구 유럽처럼 정쟁을 중단시키는 장치인 내각불신임·의회 해산제도 없고, 미국처럼, 정쟁을 중재·조정하는 장치인 국회 상원제도 없다보니, 대통령 임기 5년·국회의원 임기 4년 내내 헌법이 정쟁을 방치 내지 보장해주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따라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헌법개정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에서 헌정회가 헌법개정안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동안 헌법개정은 여러 차례 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