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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상승(常勝)장군 신립의 탄금대 전투 재조명

  • 웹출고시간2024.11.17 14:44:04
  • 최종수정2024.11.17 14:44:04

홍석호

충주시청 문화예술과 주무관

탄금대는 충주가 자랑하는 관광지이면서, 국가지정 명승지로 옛적 우륵선생이 가야금 연주와, 임진왜란 최고의 격전지 탄금대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충주시민이나 한국사에 조금이나마 관심이 있는 국민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탄금대 전투는 조선과 일본 양국 정규군이 야전에서 맞붙은 중요한 회전으로 당시 상황이 실록 상촌집에서 언급되고 있으며, 사극 임진왜란 초에 꼭 들어가는 전쟁콘텐츠로 충주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다가오는 11월 29일 충주학연구소주관으로 임진왜란과 충주의 장수들이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연다고 하며 그 중에서는 가장 돋보이는 장수는 임진왜란이라는 콘텐츠에서 항상 다루어지는 탄금대 전투이고 지휘관 도순변사 신립이다.

신립에 대한 평가는 패장, 졸장이라는 부정적 평가인데, 유성룡의 징비록에서 장수가 군사를 쓸 줄 모른다며 징비(懲毖)되고 훗날 명 제독인 이여송의 평가는 천혜의 요새지(조령)을 몰랐으니, 신립은 지모가 부족한 장수였다고 촌평하고 다산 정약용은 "신립을 깨워 왜 문(조령)을 열어 왜적을 받아들였는지 묻고 싶다"고 했다.

당시 상승장군이며, 조선 최고의 명장 신립은 왜 조령이 아니라 탄금대였는가는 의문스러움은 지금도 많이 회자되다.

당시 일본군 진격은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 가토 키요마사(加藤淸正),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등 3개로로 북상 중에 있으며 그들이 만나는 지점이 충주지역으로 각개격파를 할 수 없는 이상 한양으로 통하는 충주에서 회전을 치르고자 한 것이며, 북방군의 합류를 기다며 군력을 재정비할 시간을 벌려고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신립은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익숙한 궁기병을 필두(馳突, 馳射)로 보병을 뒤로하고 달천평야에서 달모양(車輪)의 진을 펼쳤던 것 같다.

이에 맞선 일본 선봉장 고니시는 장창병과 뎃포(鳥銃)병을 동시 운영하고, 아마도 고대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칸나이 전투에서 썼던 망치와 모루전술을 응용한 양익포위 전술에 조선군은 궤멸되고 말았다.

신립은 충주천 북쪽 탄금대로 몰려 종사관 김여물과 함께 남은 전력을 이끌고 최후의 결사 항전을 벌였으나, 기울어진 전세는 배수진으로 마무리 되며 김여물의 전사와 신립의 자결로 마무리된다.

훗날 그 자제인 신경진과 김류는 인조반정 공신 인연으로 이어간다.

물론 신립의 전장선택에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당일 야전지휘에도 적의 우회기동을 전혀 무시한 닥돌의 전투는 기병과 보병의 연계성을 고려하지 않는 지휘능력에도 문제점은 있어 보인다.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에서는 시종일관 부정적 입장이지만 유성룡은 동인이고, 신립은 서인인 점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신립의 군세는 많은 설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8천의 병사로 보고 있다.

이에 반해 고니시 군세 1만8천과 가토 군세가 2만2천으로 총 4만명 정도의 일본군으로 보이고 있다.

물론 가토가 탄금대 전투에 참여했는지는 불문명하지만 수적 열세와 훈련받지 못한 보병, 우천으로 인한 기병전술의 한계, 제승방략의 문제점으로 대패했지만, 그래도 임란초 정발, 송상현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투는커녕 삼십육계 줄행랑만 쳤던 타 장수와 다르게 끝까지 항전한 장군이었다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당시 북방 여진족 니탕개의 난을 진압해 용장으로 이름을 떨쳤던 장군이지만, 명장과는 거리가 멀어 탄금대 전투의 패배로 모든 걸 잃어버린 비운의 장수이며, 도순변사는 그와 맞지 않는 직책이었던 것 같다.

뜻깊게도 11월 29일 '임진왜란과 충주의 무장'이라는 학술회의를 충주학에서 개최한다.

충주 탄금대전투와 신립'이라는 주제발표가 있다고 하니 신립에 대한 어떤 평가를 할지 궁금해지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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