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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0.05.13 18:29:54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조혁연 대기자

 홍재전서(弘齋全書)는 금성대군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전패를 모실 자리를 설치하고 서쪽을 향하게 하자, 유(금성대군 지칭)가 "우리 임금님은 영월에 계신다"하고 북쪽을 향해 슬피 운 후 다음, 네 번 절하고 드디어 죽었다."

 홍재전서는 정조가 지은 시와 문장을 모아서 편찬한 것을, 전패는 객사에 봉안된 위패로 임금을 상징한다. 함께 거사를 했던 당시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1457)도 박천에 유배된 끝에 그해 가을 교살됐다.

 이보흠은 매우 유능한 관료였다. 그는 규휼제도의 일종인 사창제(社倉制)를 대구에서 시범적으로 실시해 큰 성과를 거뒀다. 때문에 당시 대구 백성들로부터 '순량'(循良)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문종은 이런 이보흠을 정4품 고위직인 사헌부 장령으로 발탁했다.

 한 마디로 이보흠은 '문종의 사람'이었다. 형(문종)의 아들(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오른 세조가 이런 이보흠을 곱게 봤을 리가 없다. 그는 즉위 후 얼마안가 이보흠을 궁벽한 외직인 순흥부사로 발령냈다. 이때의 외직은 지방직을 말한다.
 
그런데 이 부분은 잘 이해되지 않는 면이 있다. 정황상 세조는 금성대군과 이보흠 모두가 자기에게 적대적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경북 순흥과 강원도 영월은 직선거리로 1백리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 금성대군을 순흥으로 유배를 보냈다.
 
따라서 사가들은 세조의 두뇌였던 한명회가 꾀(?)를 낸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이 부분 일련의 진행은 두 사람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사전에 기획된 것임을 의미한다. 사가들은 역모 격문이 노비 이동(李同)의 손에 쉽게 들어가 관에 직보된 과정도 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이때의 노비 이동은 사전에 포섭된 내부 밀탐자가 된다.
 
세조실록은 같은 날 일어난 일로 △윤자라는 인물 등을 파견해 죄인들을 심문케 하고 △내의(內醫)를 보내 환자들을 볼보게 하며 △금성대군을 서울로 압송하라 등의 내용을 적고 있다. 얼핏보면 일처리가 합리적인 순서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하루 동안 발생한 일로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따라서 사가들은 여러 날에 걸쳐 일어난 일을 뭉뚱그려 기록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유는 잔혹한 장면의 노출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실록을 보면 여러 대신들의 금성대군 사사 요구에 대해 세조가 "그래도 골육지간인데 좀더 생각해 보겠다" 정도로 답변하는 장면이 훨씬 많이 등장하기도 한다.
 
금성대군과 이보흠의 역모, 즉 정축지변에는 순흥지역 백성들도 다수 희생됐다. 사가들은 어림잡아 3백여명 정도가 희생된 것으로 보고 있다. 순흥에서도 죽계(竹溪)라는 곳에서 가장 많이 희생됐다. 순흥은 이후 252년 동안 행정지명이 사라졌다가 숙종 때 본래 지명을 되찾게 된다.
 
금성대군과 이보흠의 위패가 봉안된 사당이 청원군 북이면 용계리에도 존재한다. 영조 때 청원지역 향반들에 의해 세워진 사당으로, 순흥 죽계의 지명을 그대로 따 '죽계사'로 명명했다.
 
숙종대부터 영조 17년(1741) 전까지는 이른바 서원 남설기에 해당한다. 지역 향반들이 자신들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 사당이 중심이 된 서원을 지나치게 많이 세웠다. '죽계사'도 이 시기에 건립됐다. 솟을대문 이름은 성인문(成仁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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