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회에 이문건의 젖어멈 노비를 언급했다. 그러나 조선시대 노비들의 명칭과 역할은 의외로 세분화돼 있었다. 먼저 미산(未産) 노비, 잉임(孕任) 노비, 복중태(腹中胎) 노비 등의 명칭을 꼽을 수 있다. 미산노비는 출산하지 않은 여종, 잉임노비는 임신한 여종, 복중 태노비 역시 뱃속에 아이를 갖고 있는 여종을 의미하고 있다. 태아는 종모법에 따라 성별에 관계없이 숙명적으로 노비가 돼야 했다. 이밖에 육아와 관련된 노비로는 '업저지'가 있다. 업저지는 주인집의 젖먹이 아이를 업어주며 하루종일 함께 놀아주는 어린 종을 일컬었다. 노비의 자식들이 주로 이 일을 맡았다. 계집종 중에는 성장해서도 결혼한 주인 아씨를 따라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런 계집종은 '교전비'라고 불렀다. 시댁 예의범절을 조언하고 말동무가 되는 것이 교전비의 주된 역할이었다. 그러나 교전비는 대체로 얼굴이 곱지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자칫 남편과 눈이 맞아 첩으로 들어앉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 양반가에서는 장례까지도 노비의 힘을 빌렸다. 이른바 '곡비'(哭婢)가 존재했다. 곡비는 그 지역 양반이 죽었을 때 빈소는 물론 무덤까지 따라가 대신 슬피 울던 노비를 말한다. 동네에서는
조선시대 사노비는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다시 구분된다. 지금도 식구와 같은 표현으로 '식솔'이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되고 있다. 솔거노비는 주인과 한 집에 살면서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비를 일컫는다. 외거노비는 문자 그대로 집밖에 거주하는 노비를 말한다. 자유가 조금 더 주어진 대신 매년 일정한 노동력과 농산물을 바쳐야 하는 신공(身貢)의 의무가 있었다. 조선시대의 한 해 농사는 사실상 노비와 관련된 행사로부터 시작됐다.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말 중에 '종날'이라는 연례 행사가 있었다. 이는 음력 '이월 초하룻날' 온 집 안의 먼지를 떨어낸 후, 노비들에게 떡 대접을 했던 풍습을 일컫는다. 겉으로는 양반 주인집이 노비를 격려하는 날이지만, 노비에게는 한 해 고된 노동의 시작을 의미했다. 농사와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음력 정월에도 '문안비'라는 풍속이 존재했다. 조선시대 양반가 부인은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다.따라서 음력 정월 초이튿날부터 보름 사이에 어린 계집종을 친척집 등에 보내 대신 새해 문안인사를 드리게 했다. 그래서 '문안비'다. 이때 문안비의 새해 인사를 받은 양반가에서는 그 계집종에게 세배 음식상을 후하게 차려주고, 또 세뱃돈을 두둑히
조선시대 노비들은 여러 계층이 존재했다. 양반가 상전들은 이중 노동과 출산 능력을 동시에 갖춘 젊은 계집종을 가장 선호했다. 당시에는 임신한 계집종이 자식을 낳으면 그 아이 역시 어미를 따라 노비가 돼야 했다. 이를 '노비종모법'이라고 불렀다. 암소가 송아지를 낳을 경우 그 집안에 재산증식이 이뤄지는 것과 같은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실록에 노비 몸값에 대한 구체적인 수치가 적시돼 있다. '남종의 경우 나이가 15세 이상 60세 이하이면 값이 베 100필, 15세 이하 60세 이상이면 50필이고, 여종의 경우는 나이가 15세 이상 50세 이하이면 120필, 15세 이하 50세 이상이면 650필로 하라.'- 적어도 조선 성종대 만큼은 15세 이상-60세 미만의 연령대에서는 여종값이 20필 정도 더 비쌌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여종이 자주 상전의 '잠동무'로 불려갔던 점도 고려됐던 것으로 보인다. 의외지만 조선시대에도 노비 휴가제도가 존재했다. 당시에는 휴가를 '말미'라고 불렀다. 비슷한 표현인 '겨를'은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오희문은 1594년 음력 12월 21일자 쇄미록을 이렇게 썼다. "승노에게 말미를 줘 오는 정월 10일 전에는 돌아오도록 일러 보냈
조선시대에는 태풍을 '구풍'(風+具風)이라고 불렀고, 이로 인한 인명피해는 최대 1천여명에 이르렀던 적도 있던 것으로 나타났다. 한자 문화권에서 구풍은 '사방의 바람을 빙빙 돌리면서 불어온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키워드(열쇠말) 방법으로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한 결과, 현재 대중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태풍'(颱風)이라는 표현은 단 한 번도 관찰되지 않았다. 실록 탈초(정자체로 다시 씀)의 문장에서 세조 8년(1462)에 '颱風'이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으로 나타났으나 원문을 확인 결과, '구풍'으로 표기돼 있다. 중국에서도 '颱風'이라는 표현이 처음 사용된 것은 이보다 훨씬 후대인, 1634년의 토풍지(土風志)라는 고문헌에서 였다. 이때의 태풍이 영어 '타이푼'(typhoon)이 됐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이에 비해 '구풍'이라는 표현은 총 41건이 노출됐다. 역대 왕별로 살펴보면, 태조 1,태종 2, 세종 2, 세조 2, 성종 4, 명종 2, 선조 6, 광해군 1, 인조 1, 효종 3, 현종 2, 영조 2, 고종 11건 등으로, 선조 때 가장 많았다. '구풍' 외에 '대풍'(大風)이라는 표현도 상당수 등장하나, 겨울철에 분 사나운 바람도 '대풍'으로 적은
오희문(吳希文·1539~1613)이 쓴 쇄미록에는 총 24명의 노비 이름이 등장한다. 우리고장 영동 황간이 외가인 오희문은 이들 노비를 세습, 매득(買得), 별급(상속이나 증여) 그리고 유망비를 받아들이는 방법으로 확보했다. 유망비는 주인집을 도망쳐나와 떠돌아다니는 노비를 말한다. 이들은 상전의 수족(手足)이 되어 농삿일, 누에치기, 물품교역, 편지와 안부전달, 상전의 나들이길 수행, 밥짓기, 땔감나무 마련 등 집 안팎의 온갖 궂은 일을 다 해야 했다. 오희문 노비들의 물품교역에는 우리고장 지명도 등장한다. 지금은 휴전선 이북에 위치하고 있는 강원도 평강에서 외가가 있는 영동으로 목화를 사러온 사례가 기록돼 있다. 1596년 음력 윤달 8월 16일자 쇄미록을 보면 '덕노'라는 노비가 외가가 있는 영동 황간에 와서 목화 12근을 구매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때 소요된 시간은 총 15일이었다. '덕노'는 오희문 집에서 충성도가 가장 높았던 노비로, 이듬해 겨울에 서울로 미역을 팔러 갔다가 동상으로 엄지 발가락을 잃기도 한다. 조선시대 노비들이 매번 어떻게 그 먼 거리를 걸어다녔는가는 아직 완벽히 규명되지 않고 있다. 주막이 대중화됐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괴산 연풍은 지금은 일개 면(面)에 불과하지만 일제가 1914년에 전국 행정구역을 대대적으로 개편하기 전까지는 현(縣)의 지위를 유지했다. 연풍현은 고구려시대에는 상모현, 고려시대 때는 장풍현으로 불렸다. '연풍현'이라는 행정명칭을 처음으로 얻은 것은 조선 태종 3년(1403) 때였다. 이후 세종 11년에 충주의 동촌(東村)을, 성종 7년(1476)에는 충주의 수회촌(水回村)을 흡수하면서 행정 면적을 넓혔다. 그러나 일반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연풍현은 1600년부터 1615년 까지 약 15년간 지도 위에서 사라진 적이 있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현이 너무 피폐해졌기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발발 2년 후의 기록에 '지금 모두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 되었다'라는 표현이 보인다. '충원이 말하기를 "연풍 읍내와 서면(西面) 수회촌(水回村)은 땅이 지극히 비옥한데 지금 모두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 되었으니, 파수군(把守軍)으로 하여금 둔전(屯田)케 하여 농사를 지어 군량을 마련했으면 한다."'- 인용문에 등장한 '충원'은 신충원을 지칭하고 있다. 그는 우리고장 충주 출신으로 조령 제 2관문인 조곡관을 축성했다. 왜군이 완전히 물러가자 조정 대신들 사이에 피폐한
속보= 충주 중앙탑(국보 제 6호)의 채석 흔적이 현존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12일 공주대 이찬희(문화재보존과학과) 교수는 중앙탑 석부재의 원산지를 추적한 결과, 충주시 산척면 송강천 일대에서 중앙탑과 똑같은 성질의 암석이면서 동시에 떼어내기 수법이 남아 있는 여러 개체의 노두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노두'(路頭)는 암석이나 지층이 흙이나 식물 등으로 덮혀있지 않고 지표에 직접 드러나 있는 곳을 말한다 이 교수에 따르면 중앙탑을 조립하는데 사용된 127개 석부재를 X-선 회절법 등으로 관찰한 결과, 흑운모 화강암·염기성 포획암·페그마사이트 세맥 등의 암석학적인 특징을 동시에 보이고 있다. 또 암석이 지니고 있는 자성(磁性) 값인 전암대자율을 측정한 결과, 5.51로 나타났다. 이것과 비교하기 위해 산척면 송강천 노두의 전암대자율을 측정한 결과, 5.51로 동일한 값을 기록했다. 송강천 노두의 여러 암석 성분 역시 앞서 열거한 중앙탑 석부재와 똑같이 나타나는 등 둘은 '동일기원 암석'인 것으로 확인됐다. 전통시대 석공들은 일반적으로 △홈파기 △홈에 나무쐐기를 박고 물붓기 △얼리기를 반복한 후 보다 강한 물질로 타격하기 등의 수법으로 석재를 잘랐다고 알려
'신각은 그(조헌 지칭) 말을 옳게 여겨 기계(器械)를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성내에 봇물을 끌어들여 큰 못을 만들었다. 뒤에 왜란이 일어나자 이정암이 성을 지켜 온전할 수가 있었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신각이 사전에 준비한 공로를 추모하여 아울러 비석을 세워 그 공을 기렸다.'-선조수정실록 임진왜란 때 조헌의 충언을 유일하게 실천한 인물은 신각(申恪·?~1592)이라고 전회에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신각은 자신이 대대적으로 수리한 성(城), 즉 인용문에 등장하는 성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지역인 다른 경기도 양주의 해유령(蟹踰嶺)이라는 곳에서 왜군의 머리 70~80급을 베었다. 신각 대신 '대대적으로 수리한 성'에서 승리를 거둔 인물은 그 후임자인 이정암(李廷·1541∼1600)이다. 인용문 안에 이정암이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성의 본래 이름은 연안성(延安城)으로, 지금은 북한 지역이 된 황해도 연안읍에 위치하고 있다. 연안성 전투는 청주성보다 꼭 한달 늦은 1592년 음력 9월 1일에 있었다. 그날의 전투는 소규모 충돌이 아니었다. 왜군 수만명이 성벽에 달라붙었다. '초토사(招討使) 이정암 등이 흩어진 장수와 졸병을 거두어 죽기로
청주와 관련된 소중한 문화재가 존재하고 있으나 시가 이를 모르고 있거나, 적극적인 행정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허흥식 당시 경북대 교수는 지난 1985년 3월 고려시대 이두로 작성된 공문서인 일명 '1349년 덕령공주서'(德寧公主書)를 발견했다고 논문 발표를 했다. 당시 발표된 덕령공주서는 △51x55㎝ 크기 △치밀한 닥나무 종이 △8행 105자 △왕비인 덕령공주의 작성 △한자 외에 다수의 이두 혼용 등의 모습을 지녔다. 이두문서의 성격은 충정왕을 대신해 섭정을 하고 있던 덕령공주가 당시 청주지역의 사찰토지 분쟁과 관련해 청주목관에게 '어떤 결정'을 하명하는 공문서이다. 문서는 청주 보살사(현존)의 전조(田租)를 구산사(龜山寺·당시 개성 소재)가 가져가지 못하도록 금지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다. 즉 남편 충혜왕이 죽고 나서 불공, 제사 등의 목적으로 청주에 있는 응천사(應天寺) 소속 남선원(南禪院)과 화림사(化林寺)의 전지를 보살사에 소속시켰다. 그러나 구산사가 자기들 땅이라 하여 세금을 걷어가려 함으로, 이를 금지시키고 보살사의 소속으로 그대로 둘 것을 명령하고 있다. 덕령공주 문서는 이 과정에서 여러 군데에 거쳐 이두를 많이 사용했다. 본문에
청주성 전투에는 '임진왜란 최초의 육전(陸戰) 승리'라는 수식어가 자주 따라 붙고 있다. 임진왜란 청주성 전투는 1592년 음력 8월 1일에 있었다. 그러나 청주성 전투를 임진왜란 최초의 육전 승리로 보는데는 다소 무리가 있다. 충남 금산 진산면에는 이치대첩비가 존재한다. 권율은 그해 음력 7월 8일 금산 이치(梨峙·배재)에서 왜군과 싸워 승리했다. 규모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보다 먼저 승리한 전투가 있다. 이른바 경기도 양주 해유령(蟹踰嶺) 전투로, 1592년 5월 16일에 있었다. 실록에 관련 내용이 등장한다. 당시 전투를 지휘한 인물은 신각(申恪·?∼1592)이다. '마침 응원하러 온 함경병사 이혼을 만나 군사를 합쳐 진을 결성했는데, 여염에 흩어져 약탈하는 왜병을 양주의 게재(蟹嶺)에서 요격하여 패배시키고 70급을 참수하였다. 왜적이 우리 나라를 침범한 뒤로 처음 이런 승전이 있었으므로 원근에서 듣고 의기가 용동하였다.'- 인용문에 등장한 '게재'는'해유령'과 같은 지명이다. 어류 '게'를 한자로 쓰면 '蟹'(해)가 된다. 실록 다른 곳에도 숫자가 다소 다르나 비슷한 내용이 등장한다. '신각(申恪)은 사력을 다하여 외로운 군사를 이끌고 격전하여 사졸(士
[충북일보] 충북지역 외국인 유학생들의 지역 내 기업 취업과 정주를 돕기 위한 '외국인 유학생 취업박람회'가 31일 충북대학교 개신문화관에서 개최됐다. 교육부와 중소벤처기업부, 충북도가 주최하고 충북대, 한국연구재단,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이 주관한 이번 박람회에는 외국인 유학생 500여 명이 방문했다. 박람회에는 지역특화형 비자(F-2-R), 전문인력 비자(E-7) 발급이 가능한 △전자, 반도체·기계(현대엘리베이터㈜ 등 16개사)△식품·건강(㈜팜토리 등 10개사) △의약·의료장비(㈜휴온스 등 3개사) △화장품·뷰티(㈜뷰티화장품 등 5개사) △서비스업(㈜체인익스빌 등 2개사) △기타 제조업 (㈜금진 등 10개사) 분야 46개 지역 기업이 참가했다. 유학생들의 지역 기업 상담, 취업 면접 등이 이뤄졌다. 충북경찰청, 충북경제자유구역청, 청주출입국외국인사무소,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 등 유관기관은 외국인 유학생의 생활·취업·정주 등에 필요한 정보와 지원 사업을 안내했다. 구직 중인 유학생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이력서 컨설팅 부스, 증명사진 촬영 부스도 운영됐다. 외국인 유학생 취업박람회는 교육부와 중기부가 협업해 외국인 유학생들의 지역 내 기업 취업과
[충북일보] 지난해 겨울 청주시가 운영했던 눈썰매장에서 시설 붕괴사고가 발생하면서 10여명의 시민들이 부상을 입은 가운데 시가 올해도 눈썰매장 운영을 추진하고 있어 시민안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시는 동계방학 기간 시민들의 신체·정신적 건강 증진을 위해 즐길거리를 제공한다는 취지로 눈썰매장을 운영하겠다는 구상이지만, 사고 이후 1년만에 곧바로 눈썰매장을 여는 것을 바라보는시민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심지어 당시 눈썰매장을 실질적으로 운영했던 외주업체 관계자들과 담당 공무원이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아무리 민선 8기 청주시가 '꿀잼청주'를 기치로 삼고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지만 이번 사업은 무리한 사업 추진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우선 시는 다음달 대행사 선정을 진행한 뒤 용역을 거쳐 12월 21일부터 내년 2월 2일까지 눈썰매장을 운영하겠다는 구상이다. 장소는 생명누리공원으로 정해졌고, 이곳에는 눈썰매장과 눈놀이동산, 편의시설 등이 조성된다. 이 사업에는 모두 2억9천800만원의 예산이 투입될 예정이다. 무리한 사업 추진이라는 비판의 목소리에 대해 시는 올해에는 시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둬 아무런 사고가 없도록 만전을
[충북일보] 충북도가 주민들의 오랜 숙원인 중부고속도로 확장 등 도내 내륙지역 교통 인프라 구축에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고속도로 건설과 확장을 통해 다른 지역과의 접근성을 개선하고, 낙후됐거나 인구감소 지역의 경제 활성화를 위해서다. 30일 도에 따르면 중부내륙시대를 선도할 수 있는 교통망 완성을 위해 중부고속도로 확장, 충북 동부축 고속도로 건설, 제천~영월 고속도로 건설 등을 추진한다. 먼저 '중부고속도로 전구간 확장'은 청주 남이와 경기도 이천 호법을 잇는 구간(78.5㎞)의 4차로를 6차로로 넓히는 사업이다. 구간별로는 남이~서청주, 서청주~증평, 증평~호법이다. 이 중 서청주와 증평 구간은 실시설계 중이다. 나머지 구간은 2차 고속도로 건설 계획(2021~2025년)에 반영된 만큼 추진 가능성이 크다. 증평~호법 구간은 사전타당성조사 시행, 남이~서청주 구간은 반영을 정부에 건의하고 있다. 도는 이 도로의 교통량이 계속 늘어 서둘러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산업 물동량과 대형 화물차 증가로 차량 지·정체 등 교통 혼잡비용이 계속 늘고 있다는 점도 내세우고 있다. 도내에서 상대적으로 낙후된 저발전 지역이자 인구가 계속 감소하는
[충북일보] "충북에 자리잡은 지 27년입니다. 이젠 충북의 발전을 위한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오스바이오㈜는 2018년 농업회사법인으로 설립돼 지난 7월 오스바이오 주식회사로 법인 상호명을 변경했다. 농업과 천연물을 기반으로 한 기술 개발과 특허로 코스메슈티컬 시장의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기업이다. 오스바이오㈜는 '의미(醫美 : Health & Beauty)'를 추구하는 기업으로 건강한 먹거리와 메디컬 푸드 식품, 뷰티 관련 사업을 주력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이일호(50) 오스바이오㈜ 대표이사는 "그간 사업을 운영하며 지역의 브랜드 컨설팅이나 기획에 많은 참여를 해왔다"며 "하지만 지난해 10월부터 오로지 우리가 갖고 있는 독자적인 기술력을 바탕으로 '오스바이오'사업에 집중하고 있다"고 운을 뗐다. 오스바이오㈜는 미나리, 개똥쑥, 싸리나무, 미선나무 등 다양한 천연물 소재를 활용한 화장품, 식품, 의약품 연구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이 대표는 "독자 연구소를 갖고 있고, 회사 투자의 중심은 연구쪽으로 이뤄진다"고 밝혔다. 최근 오스바이오가 주력하고 있는 품목은 '비린내를 제거한 생선'과 '대나무 쌀을 활용한 효소 숙성으로 만든 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