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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의 예인과 장인들 - 옹기장 박재환

장인의 숨결 '살아 숨쉬는 옹기' 빚어내

  • 웹출고시간2009.09.10 13:37:48
  • 최종수정2014.07.20 13:28:50
구한말 외국인들이 우리 풍습을 찍은 사진을 보면 상투를 틀고 흰 무명옷을 입고 지게에 옹기를 잔뜩 짊어지고 서서는 골목을 걸어오는 아낙네를 바라보는 옹기 장수 모습이 있다.

청동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와 민무늬토기에서 시작된 옹기는 질그릇과 오지그릇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질그릇은 흙으로 만들어 말린 뒤 유약(잿물)을 덮지 않고 900℃ 이하의 약한 온도에서 구워낸 것으로 떡시루 등이 그것이다.

오지(烏只)그릇은 붉은 진흙으로 만들어 햇볕에 말리거나 구운 뒤에 오짓물(잿물)을 입혀 1200℃의 고온에서 구원 낸 것으로 질그릇에 비해 방수성이 우수해서 독·항아리·뚝배기·약탕관·화로·요강 등이 그것이다.

전통 옹기는 쌀, 콩 등 각종 곡류와 음식을 보관하거나 장류, 김치, 술 등을 발효시킬 때 진가를 발휘하는 '숨 쉬는 용기'로 생활 전반에 씌였다.

전통적으로 우리 조상들은 조미료와 주식 ·부식물의 저장용구, 주류 발효 도구, 음료수 저장 용구 등으로 옹기를 사용해 왔다

옹기들의 무게가 상당해서 옹기장수가 냇물을 건너고 고개를 넘어 이 마을 저 마을로 팔러 다니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 터이지만 당시는 생활용기가 온통 옹기였기 때문에 그만큼 수요도 많았고 이를 만들거나 파는 사람들도 많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것이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들어서 플라스틱, 텅스텐, 양은 주물 용기들이 등장하면서 상대적으로 무겁고 잘 깨지는 옹기는 외면받았고 옹기장이들은 다른 직업으로 전직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면서 옹기산업은 급속도로 쇠락의 길을 걸었다.

더욱이 유신정권 시절이었던 1970년대 하반기에는 옹기에 바르는 광명단(납이 섞인 페인트 원료)이 인체에 유해하다는 오해를 받아 전국의 옹기업자들이 구속되는 파동까지 겪으며 옹기산업은 더욱 위축되기도 했다.

강외면의 차진 흙으로 떡가래를 만들어 타름을 쌓고 부채질과 전잡이를 하며 항아리를 만드는 일련의 과정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박 옹은 "당시와 지금의 전 세계의 도자기 납 허용치가 7ppm이고, 아무 것도 바르지 않고 흙으로만 만들어도 토양 속에서 자연적으로 납이 0.4ppm이나 검출되는 데 당시 어떤 유약업자의 로비 때문인지 정부에서 납 허용치를 0.1ppm으로 제한하는 법 개정을 했다"며 "당시 내 옹기에서도 0.148ppm의 납이 검출돼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

그 후 이돈명 변호사 등이 국내 옹기들을 독일 등 선진 각국에 보내 검사, '안전하다'는 결과를 얻어 전두환 정권에 진정을 해 다시 허용치를 1ppm으로 올렸다는 것이다.

박 옹은 "광명단을 넣으면 800~900℃ 낮은 온도에서도 잘 구워져 한때 대량생산업체들의 상술로 유해성분 논란이 있었지만, 전통옹기는 1250℃ 고온에서 굽기 때문에 오히려 토양 속의 본래 납 성분까지 날아가 버린다"며 "지금도 전 세계에서 유약의 70%가 광명단일 정도로 안전하며, 광명단을 발라 구워야 방수성 등이 뛰어나다"고 자신있게 말하고 있다.

◇ 통기·방수성 뛰어난 '숨쉬는 항아리' 재조명

이렇게 수난을 겪었던 우리의 옹기 그릇이 최근 들어 건강 용기로 다시 각광을 받고 있다.

플라스틱이나 금속·유리 용기 등에 비해 '숨을 쉰다'고 할 정도로 스스로 습기를 조절하고 공기가 잘 통하여 음식을 상하지 않게 오래 보관할 수 있다는 것이 여러 모로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소금물을 담아 놓으면 옹기는 내부의 소금이 밖으로 배출되어 겉표면에 하얀 소금기가 생길 정도로 외부와의 통기성이 뛰어나고, 이들 옹기 파편을 전자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미세한 공기 구멍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렇듯 훌륭한 옹기를 65년 넘게 만들며 지켜온 '독짓는 늙은이'가 있다.

지난 2003년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된 옹기장 박재환옹(77·충북 청원군 강외면)이 그다.

커다란 된장,고추장 항아리를 흙으로 빚은 뒤 유약을 바르기 전에 건조하고 있다.

박옹은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써 충청북도 청원군 강외면 봉산리 점촌(店村)마을에서 태어나 현재까지 6대째 전통옹기 도공으로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박 옹의 7대조 할아버지가 조정이 벼슬을 하다가 천주교 박해로 쫓겨났고 6대조 태진(泰進)이 지금의 옹기마을로 숨어들어와 옹기장이가 된 것이 가업의 시작이었다.

몇 년전 가마를 보수할 당시 땅속에서 '가마재축 기해년 박씨' 라 새겨진 돌이 나왔는데 기해년은 1839년 천주교 기해박해(己亥迫害)가 일어난 해로써 이때 박 옹의 선조가 옹기가마를 다시 지은 것이니 이때부터만 하더라도 박 옹의 가마는 170년 이상의 내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박 옹은 이 마을이 옹기마을로 형성된 데 대해 "인근에 있는 미호천이 지각변동을 하면서 큰 물이 넘쳐나 이 마을까지 덮쳤었고, 그 때 쌓인 앙금이 양질의 점토로 형성돼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옹기를 만드는 데는 흙과 나무가 필요한 데 먼 산에서 나무 한 짐을 옮겨오는 것보다 흙 한 짐을 가져오는 것이 비용이 더 많이 들기 때문에 옹기산업은 흙을 따라 조성된다는 것이다.

실제 이곳 강외면 일대에는 논이나 밭을 1~4m만 파도 차지고 미세한 옹기용 진흙이 나오는데 모래가 전혀 섞여 있지 않아 체질(수비질)을 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다.

그래서 박 옹도 이 일대에서 한 때는 4개 광구 120만평의 점토 광업권을 갖고 있었지만 지금은 2개 광구 60만평의 광업권을 보유하며 흙을 조달하고 있다.

이곳 강외면 옹기마을은 1940년대만 하더라도 이곳의 생산품이 기차로 북한의 함흥, 청진까지도 올라갈 정도로 '물이 새지 않는' 옹기로 인정받으며 번성했다고 한다.

◇ 어렵다는 똥장군 천 개 만든 6대째 옹기장이

11살 때부터 65년이 넘게 6대째 내려오는 가업인 옹기제작에 투신해 충북도 무형문화재까지 오르며 전통 기법을 지켜온 박재환 옹.

박 옹은 1932년 지금의 고향 마을에서 태어났지만 조선시대에 '흙백정'이라며 천시받던 옹기장이 집안인데다 아버지가 여섯 살 때 돌아가시며 가정형편은 더욱 어려워졌다.

어린 나이에 초등학교도 못가고 전북 익산의 외가집에 맡겨져 냉이와 쑥을 캐서 팔고, 남의 집 아기봐주는 일을 하다 11살 때인 1943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남의 옹기공장에 들어가 처음으로 옹기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옹기 가운데는 만들기 어렵다는 것이 양조장에서 쓰는 커다란 항아리와 똥장군이 있다.

양조장 항아리는 크기가 커서 시간이 많이 걸리고 힘들다는 것이지만 기술적으로 가장 어려운 것은 똥장군이다.

똥장군은 예전에 농사꾼들이 인분을 퍼 담아 밭으로 나르던 용기인데 입구가 좁고 안은 깊어서 한쪽 팔을 안쪽으로 비틀어 넣고 작업해야 하기 때문에 몸의 유연성이 뛰어나지 않은 사람은 만들기 어려웠다.

선배 도공들이 "똥장군을 천개 정도 만들어 봐야 쓸만한 것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한 말을 듣고 박 옹은 밤낮없이 홀로 연습해 9년이 지난 20세 쯤에 700개 정도 만들고는 합격품을 구워 내는 집념을 보였다.

박 옹은 곧 있을 캐나다의 전 세계 무형문화재 작품전에 출품을 요청받았는데 바로 이 똥장군을 출품하여 국내 옹기 기술의 진수를 보여 줄 예정이다.

한편 박 옹은 1958년 충북 보은군 회북면 송평리 옹기공장, 1959년 경기고 용인군 포곡면 삼계리 옹기공장, 1967년 충남 연기군 금남면 용담리 옹기공장등을 찾아 다니며 옹기에 대한 새로운 기술과 이론을 습득하며 완성도를 더욱 높여 갔다.

크고 작은 옹기에 유약과 광명단을 발라 구워낸 뒤 금이 가거나 불순물은 없는 지 점검하고 있다.

그제서야 박 옹에 대한 입소문이 전국으로 퍼져 1969년에는 전국에서 규모가 제일 큰 인천시 경서동의 옹기공장 업주로부터 직원들에게 기술을 가르쳐달라는 제의를 받고 2년 동안 그곳에서 일하다 1971년 지금의 고향으로 돌아와 선조들의 옹기공장을 다시 인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97년에는 국정홍보처에서 만든 'IMF 외환위기 10년을 맞았지만 우리 경제는 되살아났고, 대한민국은 결코 식지 않는다'는 내용의 TV CF에 주인공으로 출연, 정성스럽게 흙을 다지고 옹기를 만들어 결국은 명작을 구워내고 만족스러워하는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박 옹은 "전통옹기야말로 우리네 신토불이 음식물들을 담아 보관하는데 제격인 무공해 용기"라고 강조한다.

광명단을 바른 전통 옹기야말로 방수기능이 뛰어나고 통기성이 있으며 흙으로 만들어 김치 등 소금성분을 만나더라도 산화과정을 밟지 않고 음식 고유의 맛과 향을 고스란히 지켜준다는 것이다.

170년도 더 오래된 전통 가마터에서 유약이 잘 발라진 옹기들을 조심스레 꺼내고 있다.

박 옹은 지금 이런 자랑스러운 옹기제조 기법을 음대를 나왔던 첫째 아들과 미대를 나와 조소작품으로 지난 해 현 정부 출범 기념 미술대전에서 장관상을 받고 중국 산동성의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셋째 아들(대순)에게 전수하기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또 곧 시설보강을 마치고 다시 개장할 청원군 문의문화재단지의 옹기전수관 및 가마터에 입주해 옹기 제작은 물론 교육, 전시 등 옹기 알리기에 여생을 바치겠다는 각오를 보이고 있다./박종천 프리랜서

주소 : 충북 청원군 강외면 봉산리 346

문의전화 : (043) 865-5386, 010-7706-5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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