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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군대책위 "1급 친일파 이무영 잔재 청산하라"

"독립유공자 보기 부끄러워"

  • 웹출고시간2015.08.12 13:28:10
  • 최종수정2015.08.12 20:00:38

친일파 이무영 잔재 청산을 위한 음성군 대책위원회가 12일 음성군청 현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1급 친일파 이무영의 잔재 청산을 촉구하고 있다.

[충북일보=음성] 친일파 이무영 잔재 청산을 위한 음성군 대책위원회(대표 차흥도 목사·집행위원장 김규원 이하 대책위)은 12일 음성군청 현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광복70년을 맞아 1급 친일파 이무영의 잔재 청산을 촉구했다.

이번 대책위의 기자회견에는 광복회충북지부 북부연합지회, 광복회 음성지회, 음성군지역개발회, 감리교농촌선교훈련원, 가섭사, 성공회 음성교회, 음성민중연대(전국공무원노조 음성군지부, 전교조 음성지회, 공무원노조 교육청지회, 음성축협노조, 음성군농민회, 음성군여성농민회, 음성농민약국, 음성군민주연합노조, 음성노동인권센터) 등의 단체가 참여했다.

이날 대책위는 "오늘 우리는 비통하고 참담한 심정으로 이 자리에 섰다"며 "음성지역 곳곳에는 아직도 친일파 이무영의 잔재가 고스란히 남아 있고, 국가가 인정한 1급 친일파인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잔재가 청산되지 않고 있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안위는 돌보지 않은 채 희생한 독립 유공자들과 그 후손들을 보기 정말 부끄럽다"고 개탄했다.

대책위는 "이무영의 친일 행적은 그의 문학 작품과 기고 글 등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고 전했다. 그는 단순한 친일, 잘 몰라서 한 친일, 어쩔 수 없어서 한 친일과는 거리가 멀고, 신념을 가지고 철저하게 민족을 배신한 자이면서도 그것이 민족을 위한 정당한 일이었다고 합리화하기 조차 했으며 해방 후에도 단 한 번의 자기반성이나 사죄가 없었던 뻔뻔한 친일파라고 비판했다.

또한, 이무영의 친일 행적은 지난 2012년 국회에서 통과된 '일제 강점 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진상규명보고서 결정문에 무려 48쪽에 걸쳐 친일죄상이 적시돼 있고, 친일인명사전에도 7쪽 분량으로 친일문학의 구체적 표현이 세세히 수록돼 있다고 소개했다.

1908년 음성에서 태어난 이무영은 1920년까지 충주에서 자라며 학교를 다닌 뒤 일본으로 건너가 가토 다케오로부터 문학수업을 받았고, 1929년 귀국 후 교사, 출판사 직원을 거쳐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며 소설가로 활동했으며, 동아일보를 그만둔 1939년 경기도 시흥에 정착한 뒤에는 농민문학 창작에 열중했다.

그의 작품에 친일이란 먹구름이 드리운 건 이때부터였다. 그는 1942년 조선총독부 관변단체인 조선문인협회의 소설·희곡회 상임간사를 맡았으며 같은 해 9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일본어 신문 '부산일보'에 일문 장편소설 '청기와집'을 연재했다.

이 작품은 조선인 작가가 일본어로 쓴 최초의 연재소설이다. 이 소설로 일본의 신태양사가 주관하는 제4회 조선예술상 총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해방 후 대학에 출강하다 6·25 전쟁 당시 군에 입대한 이무영은 1955년 국방부 정훈국장(해군대령)으로 예편한 후 1960년 사망전까지 친일파 청산을 폄훼하거나 친일파를 시대의 희생양으로 묘사한 다수의 글을 남기기도 했다.

대책위는 음성군 향토민속자료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무영 친필원고, 유품 그리고 이무영 생가 마을 입구에 세워진 표지석을 비롯한 생가터에 있는 기념비, 흉상, 이무영 기념사업 등 이무영과 관련된 모든 잔재를 없애 주시기 바란다고 음성군에 촉구했다.

음성 / 남기중기자 nkjlog@hanmail.net


◇이무영의 친일 행적이 드러난 작품들

이무영, 조선예술상 총독상을 수상한 농촌소설가

이무영은 '청기와집'이나 '향가' 등에서는 작가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계몽주의적인 젊은 주인공들'을 등장시켜 조선의 근로대중을 일제의 총동원체제에 합류시키려고 시도했다. 1943년에 <매일신보>에 연재한 장편소설 '향가(鄕歌)'는 농촌소설의 형식을 빌려 농촌에서 '총후봉공'과 지원병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무영이 문학 활동으로 일본에 협력하기 시작한 것은 <국민문학>에 실린 '대동아전쟁으로 무엇을 배웠는가·'라는 설문에 대한 응답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에서 그는 영미에 종속적인 지금까지의 문학을 비판하면서 시국에 조응하는 문학을 추구할 것임을 밝혔다.

"관념적인 문학이거나 학문 같은 것이 전쟁의 경우 커다란 역할을 할 수 없으며, 위대한 국민정신이 없는 곳에 힘찬 문학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지금 새삼스럽게 통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민이며 그리고 작가의 한 사람으로서 장차는 투쟁정신을 갖지 않는, 숫자만의 군인을 앞에 두고 두려워서 옹송그리고 있는 영미의 수뇌자들을 거울로 하고 노력해 나갈 것입니다."

-<국민문학>1942년 2월호

4년여 동안 일본 작가 가토 다케오를 사사하여 일본어 창작에 자신감을 가진 그는 시국적 문학의 창작 수단으로 일본어를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작가가 모국어를 포기하고 식민지 종주국의 언어로 문학을 창작하겠다는 것은 이를테면 작가로서의 자기 정체성의 심각한 부정이었다.

"오늘날의 일본어는 일본만의 국어가 아니며, 동아 10억의 국어가 되고자 하고 있다. 종래 조선 반도만의 좁은 지역만의 조선어로 쓰이고, 그 지역에 삶을 갖는 자만으로 친숙하던 조선문학은, 이후 일본 내지는 물론 멀리 지나, 남방 방면에도 전파될 가능성이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조선문학은 이제부터 커다랗게 발전할 것"

- '국어문제회담(國語問題會談)'(<국민문학>1943년 1월호)

그는 침략전쟁이 수행되고 있는 국면에서는 결전자세가 강조될수록 문학가의 특수성이 잘 활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마침내 문학을 전쟁의 도구로 상정하고 창작을 생산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었다.

"애국 문학자가 제작한 위대한 문학작품은 그 한 자 한 구절이 포탄이며 전선 장병이 목말라하며 후방의 국민에게 요청하는 비행기이기 때문에 우수한 문학자를 결전하 생산 각 부분에 계속 투입하고, 그들에게도 생산수량 전임제랄까, 일정한 기간 내에 국가가 요청하는 우수한 문학작품을 생산시키자."

- '결전문학의 수립을 위해'(<문학보국>1944년 8월호)

그은 이태준과 공동으로 엮은 <대동아 전기(戰記)>에서 '대동아전쟁'의 성격을 규정하면서 영미와 싸우는 '무적 황군'의 활약상을 '국어' 즉 일본어를 해독 못하는 조선인들에게 널리 알리려 했다.

"유사 이래로 인간사회의 전쟁이란 전부가 침략 다시 말하면 무력으로써 권리를 뺏고 땅을 뺏고 백성을 뺏아서 자기 나라의 노예를 만드는 것이었더니라. 그러나 이번 대동아전쟁은 오랫동안 영미의 악정 밑에서 허덕이고 있던 대동아의 민족으로 하여금 스스로 일어서게 하기 위해서 이 공영권 내에 있는 영미 두 나라의 세력을 쫓아내자는 데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동아공영권 내에 있는 10억의 유색 인종이 한 덩치가 되어 단란하게 살자는 것이다."

1943년 2월부터 8월까지 이무영은 <경성일보>에 일문 장편소설 '바다에의 서(書)'를 연재했다. 4월에는 일문 소설집 <정열의 서>를 발간했다. 여기 실린 작품 가운데 '제1과 제1장'은 1939년 10월에 한글로 발표했던 소설을 작가가 직접 일본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그는 일제의 농업정책으로 인해 농민들이 궁핍한 생활에 시달리는 대목들은 대거 삭제함으로써 일제에 영합했다.

이무영은 <친일인명사전>에 실린 부역 작가 가운데 가장 정력적으로 친일 문학을 생산한 작가다. 그는 꾸준히 그리고 반복적으로 문학 작품을 통해 식량 증산 등의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선전, 선동했다. 친일 작가들 가운데 그만큼 꾸준히 작품을 통해 일제의 식민 정책에 협조한 이는 많지 않을 듯하다.

이무영이 1943년 8월호 <반도의 빛>에 발표한 단편소설 '용답(龍沓)'은 일제의 중요 정책이었던 '자작농 창설'을 다루었다. 이 작품이 '농본주의'와 '휴머니즘'으로 위장한 증산보국 소설의 또 다른 양상으로 평가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자작농 창설'과 '증산보국'을 다룬 농촌소설

1944년 4월 <국민총력>에 발표된 '화굴 이야기(花窟物語)'는 증산 보국을 다룬 작품이다. 주인공들이 '화굴'이라는 천연동굴에 고구마를 저장하는 법을 생각해 냄으로써 전시하 증산보국에 크게 공헌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소설집 <정열의 서>에 수록된 '어머니(母)'에서는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증산보국에 공헌하는 농민 어머니를 그림으로써 노골적으로 일제의 정책을 선전했다.

"오(吳) 과부는 남편이 주색잡기로 가산을 탕진한 후 죽자, 남은 3000평 정도의 모래산을 아들 태근과 부지런히 일구어 훌륭한 복숭아 과수원으로 바꿔놓는다. 그런데 첫 수확을 올린 뒤, 지원병으로 출정하겠다던 태근이 감기로 병사한다. 오 과부가 슬픔에 젖어 있을 때 면(面)에서는 식량증산을 위해 마을 과수원들을 밭으로 개발하라고 시달한다. 그러나 오 과부의 사정을 늦게 안 면에서는 시달을 철회하나 오히려 오 과부는 국가를 위해서 공들인 과목을 뽑는다. 아들 태근이 나라를 위해 일하지 않은 게 죄스러워서라도 그렇게 한 것이다. 과수원에는 이제 보리가 자라게 되었다……."

그의 지극한 헌신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패망했다. 해방 후 시골에서 칩거하던 이무영은 이듬해 조선문필가협회에 참여하면서 활동을 재개했다. 그는 대학에서 강의하며 작품집 <흙의 노예>를 발간했고 좌익의 '조선문화단체총연맹'에 대응해 조직한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문총)'의 최고위원을 맡았다.

그러나 그는 일제 치하 자신의 부역 사실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오히려 그는 해방 후 처음으로 발표한 단편 '굉장소전(宏壯小傅)(<백민>1946년 12월호)에서는 친일파 청산을 폄훼했다. 또 1948년 <국민신문>에 연재한 장편소설 '피는 물보다 진하다'('삼년'으로 개제)에서 친일파 역시 시대의 희생양인 것처럼 묘사한 것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해군 소령으로 입대해 정훈교육을 담당하다가 1955년 대령으로 예편했다. 이 무렵 발표한 희곡 '팔각정이 있는 집'(<문학예술>1955. 11)에서도 친일파의 죄상을 용서하자는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친일 부역을 진심으로 부끄러워한 이가 드물다는 것은 모든 친일파의 공통된 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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