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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09.03.02 19:13:13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한반도는 일제의 통치를 받는 동안 일본식의 문화를 강권당하면서 정신적, 물질적으로 침략의 상처를 무수히 받았다. 광복이 된지 64년이 지났건만 우리의 생활주변에는 일제의 찌꺼기가 널려 있다. 식민통치 시대의 정신적 산물은 마땅히 털어버리고 물질적 산물은 버릴 것과 남길 것을 선별하여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일제는 청주읍성을 헐고 남석교를 매몰하였으며 '시가지 개정'이라는 미명아래 청주의 지명마저 일본식으로 바꾸어 놓았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간선도로를 다섯 등분하여 일정목, 이정목 하는 식으로 거리 이름을 붙였는데 다섯 번째 구간인 오정목이 지금 방아다리로 바뀐 시가지다. 또 중심이 되는 거리를 혼 마치(本町)라 불렀는데 지금도 일부사람들은 이곳을 '오정목'이나 '본정통'으로 부르고 있으니 역사의 상처는 이토록 깊은 것이다.

청주의 진산(鎭山) 우암산도 상처를 입었다. 소의 꼬리에 해당하는 당산(堂山)에는 국가 차원에서 경영하는 성황당이 있었는데 일제는 이를 헐고 그 자리에 신사(神社)를 세웠다. 남석교 네 난간 위에 장식물로 서있던 고려견(高麗犬)은 남석교의 매몰과 함께 당산 동공원으로 옮겨졌다가 그중 한 쌍이 청주대 경내에 있는 용암사로 다시 옮겨졌다. 다른 한 쌍중 1기는 충북대박물관에 보관돼 있으며 다른 1기는 행방불명되었다.

2차대전 패전 후, 일제는 본국으로 철수하며 살던 집을 헐값에 넘기거나 그냥 남겨두었는데 이를 적산가옥이라 한다. 청주에는 일제의 적산가옥이 성안길 등지에 아직도 다수 남아 있다. 또한 북문로 청주시청 주변에는 일제당시 '마루보시'라고 불렸던 통운회사의 건물이 존재한다.

충북도 각 지방에서도 일제의 흔적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정오를 알리던 오포대(午砲臺)이다. 오포대는 비상소집 및 화재경보발령 등 일제가 주민을 통제하기 위해 사용하던 구조물이다. 광복 이후에도 오포대는 낮 12시에 작동하였다. 시계가 귀하던 시절, 시장 한가운데 설치된 오포대는 점심시간을 알려주었고 화재가 발생하면 굉음을 울리었다.

'불종대'라고도 불린 오포대는 그 후에도 민방공 경보발령 시설로도 이용되었다. 도내의 오포대는 시계 사용의 보편화와 현대화에 밀려 거의 철거되었으나 영동에는 아직도 남아 있다. 이 또한 일제의 잔재이나 이를 보존하여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는 방안도 검토해볼만 하다. 청주의 동공원에는 신사의 기단석 일부가 남아 있다. 일제의 산물 중 버릴 것과 남길 것을 구분하여 보존여부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일제의 잔재 중 꼭 버려야 할 것은 물질적인 것 보다 정신적인 산물이 훨씬 많다. 우리 말 속에 침투한 일본식 용어를 폐기처분해야 함에도 아직도 상당수의 사람들은 일본식 용어를 스스럼없이 우리말과 혼용하는 사례를 흔하게 발견하게 된다. 당구장이나 이미용업소, 건축현장, 출판사, 인쇄소 등지에는 아직도 일본 말이 범람하고 있다. 3·1운동 90주년을 맞아 극일의 의지를 다지면서 그 일환으로 일본어의 찌꺼기를 말끔히 털어냈으면 한다.

일제에 의해 이리저리 뒹굴던 우리의 문화재도 이번 기회에 다시 둘러보고 재정비를 해야 한다. 임란당시, 최초의 승전지인 청주읍성은 송두리째 없어졌다. 최소한 읍성문 만이라도 복원하여 청주시민의 긍지를 살려나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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