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름많음동두천 22.4℃
  • 구름많음강릉 23.7℃
  • 맑음서울 24.0℃
  • 구름많음충주 23.8℃
  • 구름조금서산 26.0℃
  • 구름조금청주 25.2℃
  • 구름많음대전 24.7℃
  • 구름많음추풍령 23.4℃
  • 구름많음대구 23.5℃
  • 구름조금울산 24.7℃
  • 구름많음광주 25.8℃
  • 구름조금부산 27.9℃
  • 구름조금고창 26.8℃
  • 구름조금홍성(예) 26.0℃
  • 구름조금제주 27.7℃
  • 구름많음고산 25.8℃
  • 구름조금강화 23.1℃
  • 구름많음제천 22.2℃
  • 구름많음보은 23.4℃
  • 구름많음천안 24.0℃
  • 구름조금보령 26.1℃
  • 흐림부여 22.9℃
  • 구름많음금산 24.8℃
  • 구름많음강진군 25.9℃
  • 구름많음경주시 24.7℃
  • 맑음거제 25.1℃
기상청 제공

최근기사

이 기사는 0번 공유됐고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웹출고시간2010.08.30 16:59:57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아 잊지 말아야 할 중북의 두 선비가 있다. 한 분은 소설 임꺽정의 저자 벽초 홍명희의 부친이 되는 일완(一玩) 홍범식(洪範植)이며 또 한 분은 청주 선비인 소당(素堂) 김제환(金濟煥)이다. 두 분의 공통점은 경술국치를 맞아 일제에 항거하여 자결했다는 점이다.

금산군수로 있던 홍범식은 경술국치가 있은 1910년 8월29일, 국파군망 불사하위(國破君亡 不死何爲:나라가 패망하고 임금이 없으니 죽지 않고 무엇하리)라는 유서를 남기고 객사 뒤뜰 소나무에 목을 매어 자결했다. 홍범식은 또 아들 홍명희에게 "죽을지언정 친일은 하지 말고 나를 욕되게 하지마라"는 유언을 남겼다. 홍명희는 그 유언에 따라 중국으로 망명, 항일독립단체인 동제사에 가입하여 활동하다 1919년 향리인 괴산으로 돌아와 아우 홍성희, 숙부 홍용식 등과 괴산의 3·1 운동을 주도하였다.

홍범식에게는 1962년에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되었다. 암울했던 근대사에서 목숨을 초개같이 내던지며 일제에 항거했지만 그에 대한 세인의 평가는 싸늘했다. 그의 아들 홍명희가 월북하여 북한 부수상을 지냈기 때문이다. 사실 홍범식은 이데올로기와 무관한 충청도 선비로 대쪽 같은 기개가 청사(靑史)를 빛내고 있건만 아들의 월북으로 인해 도매금으로 넘어가 사람들은 그 업적에 대해 평가절하 하거나 말하기조차 꺼려했다. 래드 콤플렉스 속에서 뜻하지 않게 이념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괴산읍 동부리에 있는 홍범식의 고택은 오랫동안 폐가로 방치돼오다 근래 들어 새 모습으로 단장했다. 그 고택은 대대로 사대부가 살던 집으로 선비정신을 간직하고 있으며 일제에 항거한 민족혼의 산실이다. 고택 사랑채는 3·1운동 당시, 홍명희가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며 만세운동을 모의하던 곳이다. 홍범식에 대한 평가가 햇빛을 보면서 1998년에는 괴산향토자료전시관 앞에 홍범식 추모비가 세워졌다. 2000년 8월에는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이 홍범식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국가차원에서 선정한 독립운동가임에도 정작 우리고장에서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괴산문화원이 주축이 되어 홍범식 선생 추모제를 지낸 것은 만시지탄이나 선생의 업적을 제대로 평가하는 기회가 됐고 선생에 대한 지역사회의 인식을 새롭게 했다는 점에서 무척 다행스런 일이라 여겨진다. 선생의 추모비도 오는 10월15일 군민의 날을 맞아 선생의 생가로 이전을 추진할 모양이다. 충절의 고장을 현창하는 일련의 사업들이 순조롭게 진행되길 바라며 이를 계기로 홍범식 열사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당연히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본다.

낭성 출신인 김제환 선생은 경술국치 후 일제의 호적에 기입되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1913년, 오창 이산리에서 '성산대강회'를 개최하며 일제에 항거할 것을 외치다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조선총독에게 항일유서를 보낸 후 일제의 세상에서 밥을 먹을 수 없다하여 단식, 순절하였다. 1977년 정부는 건국포장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전수했다. 죽음으로 일제에 항거한 두 선생의 업적은 후세의 사표가 될 것이다.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두 선생의 생애가 재조명돼야함은 물론이다.
배너

배너


Hot & Why & Only

실시간 댓글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