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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0.07.18 17:54:30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일제의 한반도 침략에 항거한 의병운동은 을미사변 후와 을사늑약 후 2기(期)에 걸쳐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일본 낭인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을미사변이라고 하는데 이때 궐기한 의병운동이 전기 의병운동이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 병탄한 전주곡이 을사늑약이고, 을사늑약과 고종황제의 강제퇴위 직후에 일어난 의병운동을 후기 의병운동이라 부른다.

충북은 전·후기 의병운동에 걸쳐 충절의 고장답게 우리나라 의병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제천 등 북부지역에서는 의병장 유인석이 이강년 등과 함께 분연히 궐기했고 청주 등 중부지역에서는 의병장 한봉수가 주축이 되었다. 청암 한봉수는 청주군 세교리에서 태어나 대한제국 진위대 상등병으로 있었다. 구식 군대가 해산이 되자 향리로 돌아와 애국열혈 청년을 모아 의병을 조직했다. 의병장 한봉수는 치고 빠지는 게릴라 전법을 구사하여 일경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미원·내수의 경계에 있는 이티봉 전투, 낭성의 삼베울 전투, 북이면 신대리의 전투 등에서 혁혁한 전공을 쌓았고 이외에도 주재소를 자주 습격하거나 일본군의 우편행랑을 습격, 군자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신출귀몰하는 그의 행동이 하도 빨라 사람들은 그를 '번개장군'이라고 불렀다.

한봉수는 청주지역의 3·1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기미년 3월7일, 한봉수는 남주동 우시장에서 마차에 올라 장꾼들을 대상으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장꾼들과 함께 외쳤다.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대한독립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가난뿐이었다. 셋방을 전전한 그에게 박정희 전 대통령은 내덕동에 양옥 한 채를 지어 주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청주지역의 뜻있는 사람들은 중앙공원 '의병장 한봉수 송공비'를 건립하였다. 이때에 새김 문구를 의병장(義兵將)으로 하느냐, 의병대장(義兵大將)으로 하느냐 논란이 많았다. 결국 '의병대장'으로 하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어서 그렇게 각자(刻字)하였는데 제막식 후에 논란이 또 일었다. 당시에 의병활동은 계급이 명확한 군대 체계를 갖추지 못했으므로 '의병대장'운운 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아 '의병장'으로 바꿔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의견을 모았다. 그 후 송공비의 각자 중 대장(大將)의 대(大)자를 지우고 다시 '의병장'문구를 새겼는데 세월이 흐르자 먼저 번의 각자가 떠오르면서 새로 새긴 각자가 중첩되어 전체적인 비문이 보기 흉하게 됐다.

뜻있는 사람들은 한봉수 기념사업을 꾸준히 펼치고 있으나 그 현창사업은 곳곳에서 구멍이 나고 있다. 세교리의 초가삼간 생가는 흔적도 없고 그 자리엔 생뚱맞게 숙박시설이 들어섰다. 물론 내수읍 학평리에 사당과 묘소가 잘 조성되어 있기는 하나 의병장 한봉수의 행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유허지 정비사업은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진천 옥성리에 세워진 '의병장 한봉수 항일 의거비'는 한봉수에 의해 사살된 일본군 헌병 시마자키 젠지(島岐善治)상등병의 순직비가 함께 서있어 보는 사람을 어리둥절케 하고 있다. 나지막한 언덕 위에는 당초에 시마자키 젠지의 순직비가 있었는데 지난 1977년, 6월 문백 면민들이 성금을 모아 일인의 순직비를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한봉수 의거비를 세운 것이다. 묘한 역사의 현장이나 일인의 순직비를 달리 처리했으면 한다. 과거 일본이 우리에게 준 아픔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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