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봄인 곳, 봄이 오래 머무르는 곳, 봄이 길어 늘 봄인 곳이 바로 영춘(永春)이다. 듣기만 해도 왠지 따뜻하고 새싹이 돋아나는 새롭고 힘찬 느낌이 든다. 영춘(永春)은 단양에서 남한강 상류 방향을 따라 59번 국도로 가다가 단양군 가곡면 향산리에서 군간교를 건너서 522번 지방도로 5㎞ 정도를 가서 영춘교를 다시 건너면 영춘면 소재지가 나오는데 단양읍과 영월읍의 중간에 위치하여 예전에는 충청도 단양이 아니라 강원도 영월에 속한 지역이기도 하였다.
영춘은 오늘날 단양군의 한 면에 불과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영춘현, 영춘군이었다. 특히 영춘은 남한강 뱃길이 시작되는 곳으로, 1894년에 조선을 방문한 영국 왕립지리학회 회원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남긴 기행문 속에, 남한강 상류를 나룻배를 타고 이곳을 여행하면서 조선 백성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아름다운 풍광을 기록하였으며, 이 지역에서 1755년에 태어나 1788년에 세상을 떠난 유만주라는 분이 흠영일기에서 영춘 북벽과, 남굴(온달동굴)에 대하여 묘사한 글이 전해온다.
삼국사기에 보면 온달이 아단성을 되찾아오겠다고 출전했다가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온달 산성이 바로 아단성으로 추정되므로 오늘날 온달산성 아래에 드라마세트장과 온달 테마공원을 조성하여 역사의 현장을 상기시키고 있다. 또한 쏘가리 낚시와 캠핑의 성지라고 하는 영춘 북벽에는 남한강가에 병풍처럼 펼쳐진 아름다운 경치는 물론 온달동굴도 이곳에 위치한다.
1899년에 편찬한 영춘군읍지(永春郡邑誌)에 의하면 영춘은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영토였고, 이 지역을 백제가 차지하면서 아단성(阿旦城)이라 하였다. 이 지역을 고구려가 점령한 후 한 단계 승격시켜서 을아단현(乙阿旦縣)이라 하였으며 551년에 신라에 점령되었다. 이 때 고구려의 온달장군이 계립현(鷄立縣) 죽령(竹嶺) 서쪽 땅을 찾고자 출정하여 아단성(阿旦城) 아래에서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신라 경덕왕 때 자춘현이라 개칭하여 내성군(奈城郡, 영월)에 속하였으며 고려 태조 23년(940년)에는 영춘현으로 불렀다. 1399년 (조선 정종 1년)에 충청도로 이속되었으며 1895년에 영춘군으로 승격된 후 1914년에 단양군에 병합된다.
영춘은 남한강이 휘돌아가는 지형이라서 단양처럼 자주 물난리를 겪는데다가 물 건너 외진 곳에 위치하여 행정이 매우 불편하므로 연산군 2년(1496년)에는 현 소재지를 어상천으로 이전해야 한다는 공론이 일기도 했으나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으니 영춘(永春)의 지명 덕이 아니겠는가?
단양군 영춘면의 별방리(別芳里)는 본래 영춘군(永春郡) 차의곡면(車衣谷面)의 지역으로서 '별왕골' 또는 '별방골'이라 하였는데, 1941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각동(角洞)과 구미동(九味洞)을 병합하여 별방리라 해서 단양군 차의곡면에 편입되었다가 1931년 차의곡면이 폐지됨에 따라 영춘면에 편입되었고, 1973년에는 영춘면 인구가 2천139가구, 1만3천74명에 달하여 행정 업무를 분담하고자 1976년에 별방 출장소가 개설되었으며 이 때 별방 출장소 소재지 마을이 되었다가 1998년에 폐지되었다.
영춘면의 별방리는 고려말기 왕씨가 박씨를 가장하여 살다가 발각되어 끌려갔으므로 왕씨가 이별했다는 골로 '이별 별(別)'자와 왕을 뜻하는 '임금왕(王)'자를 써서 별왕(別王)이라 했다고 전해지지만 실은 '벼랑(낭떠러지)'에서 온 말이다.
벼랑이라는 지형과 관련된 지명은 엄청나게 많다. '벼랑'이 지명에서 변이되어 '바랑골(벼랑골), 발왕산, 별왕골, 바랑미, 발산, 바람골, 벼락바위, 바리골, 족지곡(足芝谷), 파랑리, 비알산, 비하리, 낭골'로 심지어는 '비렁뱅이들'이라는 지명까지 생겨나는 것도 볼 수가 있다.
강원 평창군 대관령면 발왕산도 이 산에 팔왕(八王 - 하늘, 대지, 구름, 별, 물, 바람, 해, 나무)의 묫자리가 있다 하여 팔왕산(八王山)으로 불리다가 발왕산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일제 강점기에 '임금 왕(王)' 자를 일본의 천황을 의미하는 '왕(旺)'으로 바꾸었는데 2002년에 제 이름을 찾았다. 또한 이 산이 임금의 기운을 가진 산이라 해서 발왕산이라 했다고도 전해지기도 하지만 그 어원은 '벼랑'인 것이며 현재 단양읍 소재지인 별곡리(별곡리)의 원래의 자연지명도 '벼랑골'이었으니 모두 같은 어원에서 나온 지명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