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제천에서 국도 5호선으로 동쪽으로 30여 ㎞를 더 가야하는 천년 고도 단양(丹陽)으로 가 보자.
단양은 오늘날 관광지로 전국에 알려져 있으나 충청북도에서도 가장 오지에 위치하여 예로부터 공무원들의 귀양지로 여겨 왔던 곳이다. 국도 5호선은 경상남도 통영시 도남동 미륵도와 함경북도 자성군 중강면을 잇는 총 연장 1252㎞의 일반 국도로서 한반도 국도 중 거리가 가장 긴 노선인데, 그 중간에 해당하는 제천-단양 간의 도로는 지금은 많이 보수하여 나아졌지만 참으로 험한 길이었다. 단양을 가는 지름길로 충주에서 남한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는 도로가 있는데 거리상으로는 조금 가깝지만 강변을 따라 구비구비 곡예하듯 가야하는 길이었다.
『삼국사기지리지』에는 '고구려의 적산현(赤山縣)으로 경덕왕 때 단산현(丹山縣)으로 고친다'고 기록되어 있으며,『고려사지리지』(양광도)에 '단산현(丹山縣)은 본래 고구려의 적산현(赤山縣-赤城縣이라고도 함)으로 충숙왕 5년(1318)에 지단양군사(知丹陽郡事)로 승격시켰다'는 기록에서 '단양(丹陽)'이라는 지명이 처음 나타난다. 따라서 이후의 고지도나 고문서에는 단양(丹陽)이라고 기록되어 있다.『여지도서』에는 읍내면, 동면, 서면, 남면, 북면, 소야촌면, 조산촌면 등 7개 관할면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읍치는 읍내면 하방리에 있었으며, 하방리는 1985년 충주댐 건설로 이 지역이 수몰될 때까지 그 기능을 담당하였다. 1914년 단양군 읍내면과 서면을 합하여 봉화면으로 개칭되고, 북일면과 북이면이 병합하여 매포면으로, 소야촌면과 조산촌면을 병합하여 적성면으로, 대곡면과 가야면을 합하여 가곡면으로, 영춘군은 단양군에 통합되면서 영춘면이 되었다. 그리고 후에 대흥면과 금강면을 합하여 대강면이라 하고, 봉화면은 다시 단양면으로 고친 후 단양읍으로 승격하게 되는 것이다.
단양은 1980년대의 충주댐 건설로 그야말로 천지개벽을 하게 된다. 단양군의 군청소재지인 단양읍 중심지의 80% 정도가 수몰되고 단양군 청사와 단양읍 주민들이 신단양(당시 매포읍 별곡리)으로 이전하면서 옛 단양 지역에는 구단양출장소가 설치되었다. 이후 구단양은 1992년에 단성면으로 승격되지만 천년고도인 단양이 하루아침에 시골 면소재지로 바뀐 것을 단암(丹巖) 우탁(禹倬),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을 비롯하여 옛 단양 군수였던 퇴계(退溪) 이황(李滉) 등의 조상님들이 본다면 얼마나 놀라실까?
1985년 봄! 집집마다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붉은 꽃잎으로 뒤덮인 모습은 그야말로 글자 그대로의 단양(丹陽)이었다. 그러나 단양 주민들이 정든 고향, 정든 집을 남겨두고 눈물 흘리며 신단양으로, 대강면으로, 적성면으로, 충주·청주를 비롯한 타지역으로 이주해 간 후의 단양은 전쟁이 지나간 것처럼 폐허가 되었다. 단양천을 가로 지르는 다리의 폭파를 시작으로 건물을 철거하는 중장비 소리만이 귀에 쟁쟁하더니 여름에 접어들기 전에 물에 잠기기 시작하며 서서히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다. 고려 왕조가 망하고 남겨놓은 개성의 왕궁터는 황성옛터라는 노래를 만들어냈지만 천년고도 단양은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을 실감케 한다.
단양이라는 지명은 '연단조양(鍊丹調陽)'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연단(鍊丹)'은 신선이 먹는 환약을 뜻하고, '조양(調陽)은 빛을 골고루 따뜻하게 비춘다는 의미로 '신선이 다스리는 살기 좋은 고장'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해석은 '단양(丹陽)'이라는 지명이 만들어진 후에 유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보다는 '사인암 등의 바위가 붉은 색을 띠고 있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적산(赤山). 단산(丹山)'이라는 이름들이 공통적으로 '붉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단양(丹陽)이라는 지명이 만들어진 지명의 유래로서 타당하다고 보여진다.
단양(丹陽)의 이러한 옛 이름들은, 지금은 폐교되었지만 단양군 어상천면에 있었던 단산고등학교(丹山高等學校), 적성비(赤城碑)에서 강 건너 내려다보이는 단양군 적성면(赤城面), 옛 단양읍터에 남아 천년의 역사를 지키고 있는 단성중학교(丹城中學校)와 단성면(丹城面) 등에 남아 면면이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