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의 안덕벌은 밤고개라는 지명과 깊은 연관이 있다. '밤고개'는 '방고개, 반고개, 구명고개'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어 어느 이름이 원래의 이름인지 알기가 어려우며 그 위치도 내덕7거리가 아니라 내덕동 천주교 정문 소공원이 원래의 위치이므로 1995년에 내덕7거리에 세운 밤고개 유래비는 원래의 위치로 이전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밤고개'란 글자 그대로 밤나무가 많아서 생긴 말이라고 하며 발음하기에 따라서 '방고개, 반고개'로도 발음하게 된다. 호랑이가 지나가다 방귀를 뀌어 '방고개'라고 했다는 설은 언어 유희로 재미있게 만들어진 이야기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며 지명의 유래로 삼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하지만 '밤고개'와 '구명고개'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조선 영조 때 조원의(趙元宜)라는 유생이 임금에게 보낸 과격한 상소 때문에 보은 회인으로 귀양보내졌는데, 임금은 금부도사에게 도착 즉시 유생의 목을 베라고 명했다. 청주 북쪽의 율봉원에 도착해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발걸음을 재촉하려는데 조원의는 이곳에서 하룻밤 쉬어 가자고 간청했으나 금부도사는 빨리 유배지에 도착하여 왕명을 시행하고 돌아갈 생각에 이를 거절하고 출발을 재촉했다. 이때 원에서 잡일을 하던 역졸 하나가 밤을 한 바구니 삶아 와서 시장할 테니 요기나 하고 떠나라고 했다. 일행은 다시 앉아서 밤을 먹기 시작했는데 밤 맛이 너무나 좋았다. 그들이 한결같이 밤 맛이 특출하게 좋다고 칭찬하자 그 역졸은 밤의 유래를 재미있게 설명해 주었다.
옛날 박서린(朴瑞麟)이란 사람이 남쪽으로 유배 가던 도중 밤 하나를 찰방(察訪)에게 주면서 '이 밤을 심어 그 밤나무의 꽃이 필 무렵이면 내가 귀양에서 돌아올 것이오.' 하고 떠났다. 그 후 찰방이 밤알을 심어 싹이 터서 자라 첫 밤꽃이 필 무렵 박서린이 과연 귀양이 풀려 돌아왔다. 찰방은 크게 반가워해서 이곳에 그 밤나무를 번식시켜 해마다 많은 밤을 수확하고 있었다. 밤 맛이 너무나 유명해서 한양으로의 진상 품목에 오르게까지 되었다. 조원의 일행은 역졸로부터 이와 같은 내력을 들으면서 밤을 먹다가 그만 해가 저무는 줄도 몰랐다. 일행은 하는 수 없이 그 곳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 다시 귀양지를 향해 율봉원을 떠나 고분터(高隱里)에 이르러 주막에 들러 쉬면서 막걸리 한잔을 먹고 있을 때 파발마가 달려와 어명을 전했다. 조원의의 귀양을 풀고 한양으로 돌아오게 하라는 내용이었다. 만약 율봉원의 역졸이 밤을 가져다 주지 않았더라면 그 곳에서 하룻밤을 묵지 않았을 것이고, 사면을 받기 전에 죽음을 당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고개를 '구명고개(救命峙)'라고도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고분터는 지금의 고은 사거리 인근의 마을을 가리키는데 청주에서 문의와 보은으로 갈라지는 주요 교통로였다. 이곳에 주막(막걸리집)을 차리고, 목숨을 건진 막걸리 한잔의 의미를 되살린다면 장사도 잘 되고 비록 전설이지만 청주의 역사적 발자취를 보존하는 일이 되지 않을까·
하여튼 주민들 중에는 '밤고개'가 아니고 '반고개'였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꽤 있는 것 같다. 옛날 청주읍 북문앞 방아다리에서 위방고개까지 가려면, 아랫방고개(청주대앞)가 딱 반이 되므로 반고개라 했는데 그것이 세월이 지나 방고개가 되었다는 설과 큰 고개 아닌 얕은 고개라 해서 반고개라는 설도 있어서 한자로 표기하면 '율현(栗峴)'이 아니라 '반현(半峴)'이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고개 이름이 '밤고개'인가 아니면 '반고개'인가 하는 문제는 2008년에 두 학자간에 치열한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는데 청주시는 주민들에게 결정권을 주겠다고 밝힌 바가 있다.
'밤고개'를 주장하는 학자는 조선시대 기록 어디에도 문제의 '밤고개' 지명은 나오지 않으며 다만이 고개와 관련된 명칭은 현재 일제강점기 문헌을 통해서야 확인될 수 있다고 하면서 일제시대 군사용 지도와 1914년 일제강점 이후 행정구역을 통폐합하기 이전에 만들어진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 1912년 조선총독부가 낸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 1917년 <신구대조조선전도(新舊對照朝鮮全道)> 등에 모두 '밤고개'를 한자화한 '율현(栗峴)'지명이 기록돼 있는 것을 근거로 들고 있으나, 이들은 모두 일제에 의하여 기록된 것이어서 수천년 우리 조상들에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자연 지명을 인정하지 않고 간과했다는 점에서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