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단양읍(현 단성면소재지)에서 풍기, 영주를 가려면 죽령을 넘어가야 하는데 죽령을 넘기 전에 단양의 대강면을 거쳐야 한다. 오늘날 대강이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대강 양조장에서 만든 막걸리가 청와대 만찬주로 사용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대강 양조장에서 이 막걸리를 드시면서 앉은 자리에서 6잔을 드셨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으며, 2015년에는 대한민국 팔도 막걸리 미식 테스트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을 정도로 맛을 인정받았다.
충주댐 공사로 인하여 단양읍 이전을 계획할 때 처음에는 대강면 소재지가 후보지로 물망에 오르면서 대강면이 단양군의 군청소재지가 되는 꿈에 부푼 적도 있었으나 후에 매포읍 별곡리로 이전 계획이 바뀌면서 현재의 신단양이 건설되었으니 참으로 무상하다 할 것이다.
그러면 대강(大崗)이라는 지명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듣기에 '대강 대강 살아가는 마을'이라는 의미처럼 들리게 된 것은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통폐합과 무분별한 합성 지명의 피해라고 할 것이다. 대강면은 본래 단양군의 동쪽이 되므로 동면(東面)이라 했으며, 1914년 금강면(金岡面)이라 하였는데, 1917년 대흥면(大興面)과 병합하여 대흥(大興)과 금강(金岡)의 이름을 따서 대강면이라 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영남지방에서 한양으로 가기 위해서는 추풍령, 죽령, 조령 등 큰 고개를 넘어야 했다. 그 중에서도 영주, 풍기, 안동 지역에서 과거를 보기 위하여, 또는 관리들이 업무차 한양을 가기 위해 넘는 고개가 바로 죽령이었는데 죽령을 넘으면 단양, 제천으로 가는 길목에 대강을 지나야 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이곳에 장림역(長林驛)이 있었으며 장림역에 달린 원(院)이 용부원(龍夫院)이었기에 오늘날 용부원리(龍夫院里)라는 지명이 생기게 되었고 장림역이 있던 장림리(長林里)는 대강면의 면소재지가 되었다.
죽령(竹嶺)은 신라 제8대 아달라 이사금(阿達羅尼師今) 5년(158년)에 이 고개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옛날 어느 도승이 이 고개를 넘는데 하도 힘들어서 짚고 가던 대지팡이를 꽂은 것이 대나무숲을 이루었다 하여 대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주민들은 이 고개를 죽령이라 부르지 않고 '죽령 대재'라 부르는 것은 '죽령(竹嶺)이라 쓰고, 대재라 읽는다'는 의미이고 예전에는 실제로 그랬을 것으로 짐작이 되며 '죽령(竹嶺)'은 기록에만 존재하는 한자 표기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의 의미는 무엇일까?
'대'는 지명에서 일반적으로 '대나무'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이 지역은 대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추운 지역이지만 대나무는 종류가 매우 많아서 '조릿대'라 부르는 작은 대나무는 추운 지역에도 산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옛날 우리 조상들이 생활 도구를 만드는데 '조릿대'가 많이 사용되었으므로, '대'를 '큰 대(大)'로 보아 '큰 고개'의 의미로 해석하기보다는, '대재'는 처음부터 '대나무가 많은 고개, 대나무를 채취하러 가는 고개'의 의미로 명명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죽령의 길목에는 다자구할미집이 있는데 '죽령산신묘, 국사당'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인조 원년(1623년)에 죽령 일대에 도적떼가 웅거하여 죽령을 넘어다니는 행인들을 괴롭히므로 관군을 풀어 토벌하는데 어느 노파가 관군을 인도하여 도적을 섬멸케 하였으므로 다자구할미, 죽령산신이라 불렀다. 처음에는 단양, 영춘, 풍기 군수가 모여 국사당에서 다자구할미에 대한 제를 지냈는데 일제 강점기에 흐지부지해지자 용부원리 주민들이 제를 지내왔다고 한다."
이로 보아 다자구할미집은 국가의 안녕을 위해 제를 지내는 '국사당'인데 주민들의 풍요와 평안을 기원하는 신당으로 활용된 것으로 짐작되며 오늘날 장림리의 장터를 '다자구할매장터'라 부르고 용부원리에는 다자구할매비를 세워 그 이름이 이어지고 있다. 전해오는 노래의 내용으로 볼 때 '다자구'란 '다 잔다(도적들이)'는 의미이고 '돌자구'란 '다 깨어 있다'는 의미의 신호로 추측이 되며 주민과 관군이 힘을 합쳐 도적을 물리치는 감동적인 모습이 노래에 담겨 이어져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