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천 발원지가 어디인가에 대한 논란을 매듭짓기 위해서는 최장거리만 따질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무심천의 발원지에 대한 선조들의 생각이 어떠했었는지를 밝혀야 역사성과 상징성 등을 겸비한 진정한 무심천 발원지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동국여지승람(중종 1531)>에 '무심천 적현(赤峴) 발원' 기록 이후 <청주읍지>에도 '적현 발원'만 기록되어 있지 '적현'의 구체적인 위치 언급이 없었는데 <여지도서(輿地圖書-영조 33년)>에서 적현의 위치를 '문의 적현'으로 밝힌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역사상 위대한 지리학자인 고산자 김정호는 문의 적현에서 흐르는 물이 무심천 수계가 아니고 신탄진으로 유입되는 것을 밝혀내고는 이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대동여지도>에서 낭성면 추정리의 삼일치(살티) 고개를 적현으로 표기하여 무심천의 발원지로 보았다. 하지만 이후 <대동지지>에서는 무심천의 발원지를 피반령 적현으로 수정하는 등 적현의 정확한 위치에 대하여 혼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적현의 위치가 삼일치와 피반령, 그리고 선도산 자락의 적리(가덕면 한계리)로 오락가락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지명의 변이 과정에서 찾아볼 수가 있을 것이다. 즉 '적현(赤峴)'이라는 지명은 자연 지명인 '홍고개'를 한자로 표기한 것인데 원래의 의미는 '홈고개'이다. 옛날에 농촌에서는 농사를 짓기 위하여 물을 대는 수로가 매우 중요하였는데 이 수로를 홈이라고 했으며 산골짜기에서 물이 흘러내리는 계곡도 홈이다. 주변에 홈의 지형이 많다 보니 '홈골(홍골)'이라는 지명이 많이 생겨나서 청주 지역에만 해도 문의면 문동리의 홈골을 비롯하여 낭성면 문박리의 홍골, 흥덕구 가경동의 홍골이 있으며, 상당구 용정동, 용담동의 '홍골'은 '호미골, 호무골'로 변이되어 호랑이의 전설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산을 넘는 고개의 형태는 두 가지로 구분이 된다. 산을 쉽고 빠르게 넘어가기 위하여 물이 흐르는 계곡(홈)을 따라 올라가 산줄기 사이의 낮은 안부를 넘어가는 고개는 '홈고개(홍고개)'이고, 산 능선을 따라 넘어가는 고개는 '장고개(잣고개-산고개)'인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홍고개, 장고개'가 일반명사로 쓰인 것으로 추정이 되며 낭성면 현암리의 홍고개는 세월이 흐르면서 지명으로 정착되었고, 문의면 덕유리의 홍고개는 한자로 적현이라 표기되면서 혼란의 씨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김정호가 적현을 찾기 위하여 얼마나 고심했을지 짐작이 된다. 대동여지도에서 무심천의 발원지를 삼일치(살티)로 한 것은 적현(홍고개)의 역사성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무농정 양남대로 주변에 있다는 상징성을 고려한 것으로 볼 수가 있다.
무심천 발원지에 대한 논란을 매듭짓기 위해서는 다른 지역의 발원지 논란 사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강의 경우 유로 형성에 따른 문제 때문에 실제적으로 최장거리는 아니지만 천연샘이 있는 검룡소를 최장 거리 발원지로 하고, 상징적 발원지를 우통수로 지정하였다. 낙동강은 최장거리 발원지를 너덜샘, 상징적 발원지는 황지연못이며, 울산시의 태화강은 최장거리 발원지를 탑골샘, 상징적 발원지를 쌀바위로 지정하는 등 유로가 끊김이 없고 지역사회 공감도가 높은 샘을 최장거리 발원지로 선정하였고, 지역 주민의 관심사를 고려하여 상징적 발원지를 추가로 정하는 등 다른 하천들도 발원지에 대한 논란이 있어 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하천이란 하나의 줄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작은 물줄기가 모여서 점차 큰 하천이 되는 것이기에 발원지를 하나로 정하는 것은 당연히 무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무심천 발원지를 한 장소를 정하는 것보다는 청주에서 가장 높은 산인 국사봉과 선도산(선도산과 두 개의 선두산을 합하여 하나의 선도산으로 하는 것을 전제) 사이의 골짜기(낭성면 추정리 와 가덕면 내암리 일원)로 발원 구역을 폭넓게 정하는 것이 지역간의 다툼을 막고 청주 지역의 역사적 상징성을 이어가는 길이며 나아가서는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큰 물줄기를 이루는 화합의 이미지로서 발원지의 신개념을 만들어가는 위대한 첫 발걸음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