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지명산책 - 안덕벌의 변화

2021.02.24 17:12:10

이상준

전 음성교육장·수필가

청주의 진산인 우암산 자락의 먹바우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의 모습, 서답골에서 빨래하는 아낙네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르는 조용한 산골마을 안덕벌! 오랫동안 지켜 내려온 평화로운 안덕벌의 변화는 아마도 일제로부터 벗어난 광복 이후부터라고 해야 할 것이다.

광복 직후 미군정기와 1948년 우리나라 정부 수립 후 취해진 귀속재산의 특혜적 불하, 원조물자의 특권적 배정, 그리고 은행의 특혜적 융자는 1950년대 재벌형성의 물적 기초로 작용하였으며 특히 1950년대 그 원재료와 자본재를 원조에 의존하면서 크게 성장하였던 제분, 제당, 방직 공업의 3백(三白)산업은 우리나라 재벌들이 부를 축적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청주 지역은 전통적인 농업사회로 근대화된 생산시설이 없어 조용한 교육의 도시로 불리었는데 한국 전쟁을 전후해서 산업화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전쟁 후의 극심한 식량난 해소와 폐허 복구의 필요성에 따라 정부의 지원으로 기업체가 하나 둘씩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청주방직과 신흥제분 그리고 연초제조창이다. 청주방직은 1954년 현 청원구청과 청원경찰서 자리에 설립되어 전후의 극심한 물자부족 상황에서 전후 복구 사업의 호기를 맞으며 크게 성장하였고, 가난하여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어린 소녀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함으로써 충북 지역의 경제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신흥제분 또한 전후의 식량난 해결이라는 국가 사업에 따라 설립하여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창업주인 고 민철기 사장이 운영하던 신흥 정미소가 정부로부터 밀 제분 공장으로 지정되면서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1958년 신흥제분이 탄생하게 되었다. 신흥제분은 이후 월남 파병군을 위한 야전용 진중식품을 납품하게 되면서 크게 성장하였고 속리산관광호텔을 비롯한 석유, 목장 사업 등으로 사업을 확장하면서 한때는 개인종합소득 전국 2위에 오르기도 했던 것이다.

청주방직은 청주산업단지가 조성된 후 1974년에 공단으로 이주해감으로써 제일 먼저 안덕벌을 떠나갔으며 이어서 신흥제분이 치열한 경쟁구도 속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신흥제분 건물은 헐리어 테니스코트가 되었다가 최근에는 골프연습장으로 변모하였다. 하지만 육영사업으로서 1977년에 개교한 신흥고등학교는 오늘날까지 청주의 인문계 명문 고등학교로 남아 있다.

청주방직과 신흥제분이 전후 복구라는 특별한 과정에서 갑자기 성장한 기업이었다면 청주와 충북 도민의 일자리를 제공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연초제조창이었다. 연초제조창은 해방 직후인 1946년 당시 경성전매국 청주연초제조창으로 개설되었으며 전국 담배의 30%를 생산하였다. 70년대까지 전성기를 구가하면서 고용인원이 많을 때는 3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1960년대의 청주 인구가 12만여 명이었으니 연초제조창을 통해 생계를 유지한 청주 시민이 얼마나 많았을 것인가? 따라서 산업시설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교육 도시 청주에 들어선 청주연초제조창은 청주 산업화의 상징이자 청주의 자랑거리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충북의 산업화의 주역들이 안덕벌을 중심으로 들어서면서 안덕벌은 산업의 중심지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 지역에 방직공장과 밀가루 공장, 그리고 연초제조창이 들어섬으로써 충북 도민의 농업 형태는 벼농사 위주의 자급자족 형태에서 담배와 밀과 누에고치를 생산하여 가공공장으로 팔아서 목돈을 벌고 그 돈으로 공산품을 비롯한 필요한 물건을 사게 되니 경제가 활성화되고 소비생활도 왕성해짐으로써 생활 환경이 급속하게 변해갔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옛날에는 벼농사가 주된 농사이고 밭농사는 부식을 마련하기 위한 부차적 농사였지만 이제 논에는 옛날처럼 벼농사를 지어 쌀을 생산하면서 밭에는 담배와 뽕나무를 심어 목돈을 마련하게 되니 밭농사도 담배와 누에고치 생산을 위해 벼농사 못지않게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으며, 벼농사와 밭농사는 우리 충청북도민 모두의 생활이요, 삶 그 자체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따라서 농민들은 우리 가족이 먹고 사는데 그치는 농사가 아니라 돈을 더 벌어서 더 잘 살아보기 위해, 그리고 자식 교육을 위해 농한기도 없이 그야말로 뼈 빠지게 일함으로써 생활은 조금 나아졌지만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부모님들의 끝없는 희생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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