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당산성 옛길을 따라 굽이굽이 올라가다 보면 산성 고개에 이르게 되는데 이 산성 고개를 넘어 왼쪽으로 접어들면 상당산성이고 오른쪽으로 길을 잡으면 것대산 봉수터로 가게 된다. 것대산 봉수대를 가는 또 다른 길은 상당산성 남문을 따라 올라가다가 안부에 있는 암문으로 빠져 나와 왼쪽 능선으로 곧장 1.5Km 정도 산을 오르다 보면 것대산 봉수대가 나온다.
'것대산 봉수대'는 상당산성의 남쪽에 위치한 것대산이라는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며 '것대산'이라는 지명을 오랜 세월 동안 변이되지 않도록 고착시킴으로써 지명의 어원을 찾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기에 먼저 것대산 봉수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것대산은 해발 484m의 산으로 '거질대산', '상령산'(上嶺山)이라고도 하며 지리지나 옛 지도에 대부분 수록되어 있다. 조선 시대에 이곳에 봉수대가 있어 '것대산 봉수(唟大山烽燧)'라 하였으며 경상남도 남해의 금산봉수(錦山烽燧)에서 출발하여 서울의 남산에 이르는 중간 경유지에 해당되었다. 남쪽으로 문의(文義) 소이산(所伊山) 봉수에서 신호를 받아 북쪽으로 진천 소을산(所乙山) 봉수에 연결함으로써 지금의 통신대와 같은 역할을 하였으며 나라에 적이 침입하거나 난리가 났을 때 위급한 상황을 신속히 조정에 전달하는 중요한 시설이었던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에는 '거차대(居次大) 봉수'라 기록되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비롯한 이후의 지리지에는 '거질대산(巨叱大山) 봉수'라 표기되어 있는데 모두가 '것대, 것대산'이라는 우리말 지명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것대산 봉수대의 정확한 설치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봉수 제도가 완비된 고려 시대부터 이곳에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으며, 1998년 11월 20일 충청북도 문화재 자료 제26호로 지정되었다.
것대산 봉수는 육지의 봉오리를 연결하는 내지봉수(內地烽燧)로 밤에는 불을 피워 신호를 보냈으며 이를 '봉(烽)'이라 했고, 낮에 연기를 피워 신호를 보내는 것을 '수(燧)'라 했다. 또한 연기나 불빛이 잘 전달되기 위해서 토끼나 노루 등 짐승의 배설물을 섞어 태웠다고 한다. <여지도서(輿地圖書)> 등 조선 후기의 여러 읍지에는 이 봉수대의 주둔군으로 별장(別將) 1인, 감관(監官) 5인, 봉군(烽軍) 25명, 봉군보(烽軍保) 75명이 소속되어 있다고 하며, 근무는 감관 1인과 봉군 5인이 1조가 되어 교대 근무하였다고 한다. 것대산 봉수에는 조선 시대인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에 얽힌 전설이 전해 온다.
이인좌의 난이란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의 과격파가 연합해 무력으로 정권 탈취를 기도한 사건을 말하는데 이인좌가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이인좌의 난이라고 하고, 무신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무신란이라고도 한다. 이인좌의 난은 이인좌가 청주성을 함락함으로써 시작되었으며 이인좌를 대원수로 한 반군은 병영을 급습해 충청병사 이봉상(李鳳祥), 영장 남연년(南延年), 군관 홍림(洪霖)을 살해하고 청주를 장악한 뒤 권서봉(權瑞鳳)을 목사로, 신천영을 병사로 삼고 여러 읍에 격문을 보내어 병마를 모집하고 관곡을 풀어 나누어 주었으며 청주에서 목천, 청안, 진천을 거쳐 안성, 죽산으로 향하였던 것이다.
이인좌의 난 당시에 이인좌는 제일 먼저 이곳 것대산 봉수대를 손에 넣어 조정으로 알리지 못하도록 하려고 했다. 이 때 근처에 '목노인'이라는 봉화둑지기가 딸 '선이'와 그와 혼인을 언약한 '백룡'이라는 청년이 함께 살고 있었다고 한다. 청주로 돗자리를 팔러 간 백룡을 마중 가던 선이는 아버지의 비명을 듣고 급히 집으로 달려와 보니 이미 아버지는 반군들에 의하여 살해된 뒤였다. 이는 분명히 반란이 일어난 것이라고 판단한 선이가 봉화대로 올라가 불을 당기려 했으나 뒤쫓아 온 반란군에게 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집에 온 백룡은 노인과 선이가 반란군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사실을 알게 되자 분개하여 쇠스랑을 들고 봉화대로 올라가 반란군들을 격투 끝에 해치우고 봉수대에 불을 지피어 청주에 반란군이 일어난 것을 조정에 알릴 수 있었다. 그리고는 목노인과 선이를 봉화에 화장하였다고 하는 슬픈 이야기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