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 지역은 예로부터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이기에 원과 역이 설치되고 군사적인 요충지이기도 하므로 일찍부터 지명이 한자화되어 기록되었기에 자연마을의 이름들이 많이 소멸되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따라서 한자화된 지명을 거꾸로 소급하여 순수한 우리말 지명을 재구해 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옥천의 중심지에는 삼양리(三陽里)가 있다. 삼양리라 부르게 된 것은 삼거리(三巨里)의 '삼(三)'자와 양지동(陽地洞)의 '양(陽)'자를 한 자씩 취하여 삼양리(三陽里)라 하였다. '삼거리'는 구어(口語)이고 한자로는 '삼기(三岐)'라 표기하였는데 서울, 부산, 부여 방면으로 갈라지는 세갈래 길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양지동은 양지말이라는 자연마을의 한자 표기인 것이다.
1739년 여지도서의 기록에 의하면 지금의 삼양리와 금구리(金龜里)를 읍내면 가화리(嘉化里)라 하였다. 이 마을에 가화역(嘉化驛)이 설치되면서 1891년 신묘장적(辛卯帳籍)의 기록에는 역리(驛里)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910년 군남면과 읍내면을 합하여 군내면이라 하면서 삼양리가 된 것이다.
삼양리에는 원형이 크게 훼손되고 관리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삼국시대 삼양리 토성과 삼거리 토성 등의 성터가 있고 삼양리 네거리(옛 삼거리)에는 경부선 철도가 지나던 산기슭에 1871년 4월 고종황제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알리는 척화비가 있어 이곳이 요충지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옥천읍의 금구리는 현재의 신기리(新基里)와 경찰서 사이에 있는 동산의 지형이 금거북이가 진흙에 빠져있는 형국이므로 풍수설에 금구몰니(金龜沒泥)라 하여 금거북이가 진흙에 묻혀 있는 명당이란 뜻으로 금구리(金龜里)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1905년 경부철도를 개통하면서 옥천역이 현재의 금구리 마을에 세워지자 교통이 편리해져 이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었다. 그래서 1910년 군남면과 읍내면을 합하여 군내면이 될 때 마을 이름을 금구리라 하였는데 아마도 금구천이라는 이름이 먼저 존재하고 이의 이름을 따서 금구리라는 이름을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금구천이란 '크다'는 의미의 고유어인 '금, 검, 가마'와 '도랑이라는 의미의 한자어인 '구(溝)'가 합쳐진 말로 본다면 '커다란 냇물'이라는 의미로서 하천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옥천읍 장야리(長夜里)는 한자의 의미로 보면 지명의 어원을 짐작하기가 어렵다. 이 마을에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한 덕망있는 선비가 이 마을에 들어와 숙식 이외에는 돈을 받지 않고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마을 한 장소에 자신을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고 한다. 선비가 죽은 후에 후손들이 선비를 모셔가겠다고 묘소를 파니 그 속에서 백학이 날았다고 하며 그 명당에서는 찬샘이 흘렀고, 가뭄에도 끊이지 않아 주민들이 항상 이용했다고 한다.
1739년 여지도서(輿地圖書)의 기록에 의하면 군남면 야미리(夜味里)라 표기하고 있는데 지금의 상야(上夜)와 장천(長川)을 관할하였다고 한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야미리(夜味里)와 장천리(長川里)를 합하여 두 마을에서 한 자씩 따서 장야리(長夜里)라 하였다. 이 지역의 자연 지명으로 윗배미(上夜)와 아랫배미(下夜)가 있었다. 순우리말에 '한 덩어리의 논이나 밭'을 가리키는 '배미'라는 말이 있는데 최근까지도 '논배미, 윗배미, 진배미, 높은배미, 큰배미, 작은배미' 등으로 흔히 써오던 말이다. 여러 지역의 지명에서 '배미'를 그 음과 유사한 한자의 훈을 따서 '사(巳), 야(夜)'로 표기하였다. 그러나 이 마을에서는 '배미'의 '미' 소리까지 충실하게 표기하고 있는 것이다.
장천리(長川里)란 '기다란 냇물'이라는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긴내'가 구개음화되어 많은 지역에서 '진내'라는 지명으로 쓰여오고 있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