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지명산책 - 지명은 언어의 마술사

2023.03.29 16:22:48

이상준

전 음성교육장·수필가

지명은 단순한 지형의 형태를 묘사하기 위하여 생겨나지만 오랜 세월동안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면서 각종 이미지를 부여하게 된다. 그 이미지는 개인의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소망에서부터 주민의 안위와 행복, 나아가서는 국태민안을 염려하는 사상과 철학이 스며 들어가서 새로운 생명을 가진 지명으로 재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지명 속에는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생활 모습과 함께 역사가 스쳐 가면서 전설과 유래가 점차 보완되고 다듬어져서 소설과 같은 문학 작품이 만들어지고 민족의 문화를 이루는 토대가 만들어진다. 지명이 이러한 변화를 거치는 과정을 살펴보면 마치 언어의 마술사가 마술을 펼치는 듯 감탄을 금할 수가 없게 된다.

'구렁'이라는 말은 '땅이 움푹하게 패인 곳'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지명에서는 산줄기와 산줄기 사이에 생기는 골짜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구렁골'이라는 지명이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금암리를 비롯하여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계원리, 증평군 도안면 노암리, 보은군 보은읍 산성리, 괴산군 문광면 문법리,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괴산군 칠성면 사은리, 괴산군 문광면 광덕리 등지에 보인다.

그런데 '구렁'과 유사한 음으로 '구렁이'와 연관지은 지명도 있지만 많은 지역이 '구룡(九龍)'으로 변이시키면서 '구룡리, 구룡동'이 되었고 아홉 마리의 용과 관련된 근사한 유래나 전설을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또한 '구렁산'은 '구룡산'으로 변이된 지역도 많다. 청주시 흥덕구 개신동, 산남동에 걸쳐 있는 구룡산은 산의 형세가 아홉 마리의 용이 구슬을 다투는 형국(九龍爭珠形)이라는 풍수지리와 관련한 유래가 전해지기도 하는데 주민들은 '구렁봉'이란 지명을 사용해 왔고 '구렁'을 용이 아닌 구렁이가 하늘로 올라가는 형국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오기도 하는 것으로 보아 구렁산이 원래의 지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청주시 흥덕구 비하동과 지동동에 걸쳐 위치한 부모산(父母山)은 고려 시대에 몽고군의 침입으로 이 지역 사람들이 부모산의 산성으로 피난을 가서 모두 무사하게 목숨을 건지게 되자 산의 은혜가 부모와 같다고 하여 부모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언어학적인 어원 분석과 전국의 불무산의 분포와 그 유래로 보아 '붓(불어나다)+뫼(山)+산'이 '불무산'으로 변이된 후 '부모산'이 되면서 역사의 현장으로, 그리고 부모처럼 은혜로운 산으로 찬란하게 변모하게 된 것이다.

속리산으로 가는 입구에 있는 말티고개는 보은군 장안면 장재리에 위치하는 고개이며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려 태조 왕건이 속리산에 구경 오면서 고개를 넘어가기 위해 길을 닦도록 명하고 얇은 돌(박석)을 운반하여 깔았으므로 오랫동안 이 길을 '박석길, 박석고개'로 불리기도 하였는데, 조선 세조가 속리산으로 행차할 때에 속리산면 장재리에 있던 별궁(현 대궐터)에서 타고 왔던 가마를 말로 갈아탔다 하여 말티재, 말티고개가 되었다는 설이 가장 설득력 있게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박석고개는 '박달고개'에서 온 말로 '큰 산을 넘는 고개'라는 의미를 가진 고어에서 비롯된 것이며, '말티고개'는 '크다'는 의미의 고어인 '말'이라는 지명요소가 붙어서 '큰 고개'의 의미를 가진 이름일 뿐인데 이처럼 고려 태조 왕건과 조선 세조 임금까지 등장하는 역사적 현장으로 만든 솜씨가 놀랍지 않은가?

음성군 맹동면 인곡리에 있는 꽃동네는 우리 나라는 물론 세계적으로 알려진 명소가 되었다. 꽃동네를 가려면 '꽃네미'라는 큰 고개를 넘어가야 하는데 꽃동네가 있는 위치에는 예로부터 '꽃님이'라는 동네가 있어 자연스럽게 시설의 이름을 '꽃동네'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꽃네미'는 원래 '곶너미'를 말하며 여기에서 '곶'이란 '평지에서 솟아나온 언덕'이라는 의미이고 '너미'란 '넘다'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고개'라는 말보다 먼저 쓰인 순수한 우리말이다. '꽃'의 아름다운 이미지와 '곧(곧고 바르다)'의 교훈적 이미지로 변신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그래서 '화산(花山-곶미), 직티(直峙-고드너미), 행치(杏峙, 살구나무고개·사이곶고개), 고지리(古池里), 구지리(求芝里), 구지섬(九芝島)'으로, 나아가서는 '고잔(곶의 안쪽)', 고장(마을)'으로까지 확대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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