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진천에서 농다리를 찾아가노라면 이정표에 진천농교라 표시되어 있어 진천농업고등학교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농다리라 표기하므로 진천농고와는 쉽게 구별이 된다.
농다리라는 이름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의미를 지닌 말일까. 충북도 진천군 문백면 구산동리에 위치한 이 돌다리는 <상산지>와 <조선환여승람>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1천 년 전인 고려 초에 임연 장군이 축조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고 오래된 돌다리라고 하는데 그 이름에 대한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가 전해지고 있다.
우선 다리가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지네 형상이라서 지네 '농'자를 붙여 '농다리'라 불렀다고 전해지는데 '지네 농'자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형태를 보고 추정한 민간어원설로 보이며 옛 기록에 전하는 '농교(籠橋)'의 '籠'은 대나무 바구니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농(籠)'자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물건을 넣어 지고 다니는 도구의 '농(베롱)'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고려시대 임연 장군이 '용마(龍馬)'를 써서 다리를 놓았다는 전설에서 '龍'자가 와전되어 '농(籠)'이 됐다고도 한다.
1825년(순조 25)에 편찬된 진천군지인 <상산지(常山誌)>에는 "籠橋在郡南一里洗錦川加里川合流之屈峙前橋也(농교는 군의 남쪽 십 리의 세금천과 가리천이 합류하는 굴티 앞에 있는 다리이다)"라고 기록하여 주민들이 부르는 속명은 알 수 없으나 한자로는 '농교(籠橋)'라 표기하였다.
그래서 1976년 12월 21일 충청북도의 유형문화재 제28호 진천농교(鎭川籠橋)로 지정하였으나, 2013년 1월 18일 현재의 명칭인 농다리로 변경한 것이다. 그런데 농다리라는 이름은 '농교(籠橋)'라는 한자 기록을 가지고 '농'자는 한자로, '교'는 우리말인 '다리'로 만든 것이니 구조상 어색할 뿐 아니라 이곳에 오랫동안 살아온 주민들이 부르던 이름도 아니다. 아마도 근대에 와서 옛 이름이 잊혀지면서 부르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우리 선조들은 예전에 농교(籠橋)를 무엇이라고 불렀을까. 처음부터 '농다리, 농교'라고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며 '농교'는 바로 주민들이 부르는 이름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 초기까지는 한자의 음과 훈을 이용한 이두식으로 지명의 우리말 소리를 표기했지만 고려 시대에는 의미를 한자로 옮겨 표기하였다. 이 다리는 고려 시대에 만든 것이므로 소리가 아닌 의미를 한자로 표기했을 것이다. 밟으면 움직이고 잡아 당기면 돌아가는 돌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유래가 전해지고 있으며 돌다리의 구조를 살펴보면 자연석을 냇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길게 쌓고 그 사이를 장대석으로 연결하였는데 수레바퀴의 굴대, 또는 물레방아의 바퀴의 축을 거는 굴대와 아주 유사한 모양인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래서 한자로 표기할 때 '수레의 굴대'라는 뜻을 가진 '농(籠)'자를 써서 농교(籠橋)라고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순수한 우리말 이름은 굴대다리가 아니었을까. 농다리라는 이름은 한자와 우리말의 합성어이므로 어떤 의미인지 그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지만 굴대다리라고 하면 돌다리의 형상과 돌다리를 건널 때의 흔들림, 그리고 물이 흘러가며 돌아가는 듯한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떠오르지 않는가.
농다리가 있는 지역의 마을 이름은 구산동리인데 순우리말 이름은 굴티(窟峙, 굴고개)라고 불린다. 본래 굴티라는 이름은 굴고개라는 의미로 고개의 이름이지만 전해오는 말에는 마을에 아홉 개의 골이 있다 하여 '구곡(九谷)'이라 했다고 하며, 산이 거물형국이라 '굴티'라고 하고, 거북이 마을을 지켜준다고 하여 한자로 '구산동(龜山洞)'이라 했으며 중리마을 느티나무 맞은편 상산 임씨 선조비 앞에 있는 선바위에 '구산동(龜山洞)'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행정구역 통폐합을 하면서 구곡리(九谷里)라 한 것이다. 따라서 마을 이름이 '골이나 굴, 고개'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면 '굴대다리가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굴티'라는 이름이 비롯되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또한 이곳의 행정지명을 '구산동리(龜山洞里)'라고 하는데 행정 단위(동+리)가 중첩되어 외지인에게는 어색하게 들리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