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陰城)'이라는 지명은 <삼국사기>나 <동국여지승람> 등 여러 고문서에 의하면 본래의 지명 이 '잉근내(仍斤內)'이었는데 고구려가 이 지역을 점령하면서 '잉홀(仍忽)'로 바꾸었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잉홀(仍忽)'을 '음성(陰城)'으로 바꾸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 지명은 이두식 한자로 표기한 것이어서 그렇게 표기한 이유나 과정도 알 수가 없고, 그동안 원래의 의미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추측하기를 고구려 시대에 잉근내(仍斤內)'의 '잉(仍)'자에 성(城)을 의미하는 홀(忽)을 붙여 '잉홀(仍忽)'이라 하였고 신라시대에는 한자식 표기를 하면서 '잉홀(仍忽)'의 '잉(仍)'과 '음성(陰城)'의 '음(陰)'의 한자음이 비슷하므로 잉홀을 음성으로 바꾸었다고 궁여지책으로 설명하는데 그쳐 왔다.
하지만 오랜 역사를 지닌 지명의 유래를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는 못난 후손들이라는 죄책감을 견딜 수 없어 이번에 그 뿌리를 낱낱이 파헤쳐 보고자 한다.
음성 지역은 삼한 시대에 원래 마한의 땅이었는데 백제가 마한 지역을 점령하면서 고구려 신라 백제의 삼국이 영토 확장을 위해 치열하게 다투는 접경지역이 되었다. 그래서 일찍부터 이곳에 수정산성이 만들어졌고 이 산성을 통치성으로 삼아 산성 아래 통치를 위한 관청이 들어섰다. 그 흔적이 바로 지금의 평곡리 들판에 있었던 '관뜰(官坪)'이라는 마을인 것이다. 이 마을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에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면서 '평촌(坪村-들골)'과 '기곡(基谷-터골)'이라는 마을이 들어서고, 이 마을들은 오늘날 평촌(坪村)의 '평(坪)'과 과 기곡(基谷)의 '기(基)'를 따서 '평곡리(坪谷里)'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신천리 지역에까지 마을이 생겨나게 되자 통치를 위한 읍성으로서 후에 신천리 토성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수정산성과 평곡리 지역이 음성의 뿌리가 되는 지역인 것이다.
고구려가 이곳을 점령하면서 성이 있는 군사적 요충지이기에 이 지역을 가리키는 행정명을 만들어 부를 필요가 생겼다. 이 지역의 자연 지명을 이두식 한자로 '잉근내(仍斤內)'라 표기하고 '잉근내'에 있는 읍성이므로 '잉근내'의 첫 자인 '잉(仍)'과 행정명인 '홀(忽)'을 붙여 '잉홀(仍忽)'이라는 이름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 당시 고구려가 점령지역의 이름을 정하면서 읍성이 있는 지역에 '-홀(忽)'을 붙여 불렀으므로 '잉홀(仍忽)'이라는 지명이 생기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잉근내라는 이두식 한자로 표기하게 된 원래의 자연지명이 무엇이었는가를 찾아내는 것이다.
잉근내(仍斤內)에서 '잉근(仍斤)'이란 옛날에 이두로 표기할 때 '넓다'의 관형사형인 '넓은, 너른'을 표기하기 위해 '잉'에 조음소 '근(斤)'을 붙여서 썼다. '내'는 '냇물'을 가리키므로 '잉근내'란 '넓은 내, 너른내, 널내, 늘내'라는 순우리말 자연지명을 표기한 것으로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오늘날 평곡리 지역에 전해오는 자연지명을 살펴보자.
평곡리의 자연지명에 평촌, 넓은바위, 바다미들이 있는데 '평촌'이란 너른 들판에 있는 마을 즉 '너른 골'이며, '넓은 바위'는 실제의 바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너른바위←너른 박←너른 밭←너른 들'의 변이에 따른 '너른 들'이며, '바다미들'은 '받내들'에서 변이된 것으로 보아 역시 '너른 내가 있는 들'이라는 의미의 '너른 들'인 것이다.
옛날에는 인근의 산골짜기에 비하여 이 지역은 너른 들판과 들판을 가로지르는 냇물이 있어 사람이 모여 살기 좋은 지역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음성 읍내를 가로지르는 음성천과 소여리, 신천리를 흘러오는 소여천, 그리고 상당리, 하당리와 원남면 상노리, 하로리 그리고 소수면 구안리 등에서 흘로온 구안천 등이 이곳에서 합류하게 되니 얼마나 '너른 내'요 '너른 들'이었겠는가?
그러면 통일산라시대에 왜 잉홀(仍忽)을 음성(陰城)으로 바꾸었을까?
그것은 '잉(仍)'과 '음(陰)'의 한자음이 비슷해서가 아니라 이곳의 자연 지명인 '너른내, 널내, 늘내'에서 '음(陰)'의 훈이 '그늘'이기에 '늘'을 이두식 한자로 음차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음성이라는 지명의 뿌리는 '너른 내(넓은 냇물), 너른 들(넓은 들판)'이며, 괴산의 옛 지명인 '잉근내(仍斤內)'도 역시 '너른 내'로서 '괴강'을 가리키는 말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