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조금씩 익어가는

2021.10.21 15:37:28

김희식

시인

가을이 깊다. 세월이 다가오는 것이 숨 가쁘다. 며칠 전부터 갑작스런 한파가 밀려와 가뜩이나 움츠린 내 어깨가 점점 옹송그려진다. 예전과 다른 느낌이다. 서늘히 바다 저 밑바닥에서 꿈틀대던 먼 기억이 아픔 되어 가슴에 부딪친다. 바람이 분다. 조금은 쓸쓸하고 조금은 아프다. 낙엽 물드는 길을 걷다보니 나를 잃어버렸다. 살며 많은 날들을 보냈지만 올 가을은 유별나다. 산바람이 온 몸을 휘감아 흐른다.

가만 멈추어 하늘을 바라본다. 사람답게 산다는 게 그리 만만하지 않다. 어쩌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리라. 잠시 먼지처럼 바람에 실려 순간 세상에 스쳐지나가는 존재이리라. 무심한 하늘에 흐르는 저녁 강이 비장하게 흐른다. 짙은 코발트 시간이 스미는 계절이 되다 보니 곁을 내어주던 따뜻한 마음들이 그립다. 저 혼자 잘난 멋에 철없이 뛰어다니던 날들이 그리움 되어 물든다. 나무에 걸쳐있는 차가운 저녁바람이 시리다.

하늘에선 금시라도 비가 내릴 것 같다. 산만하고 분주하게 살았다. 나만 바라보고 아파했다. 저 혼자 상처받지 않으려 많이 힘들어 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아름답지 못한 삶이 있다 해서 그의 가을색이 흐려지진 않는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조금은 흔들리며 사는 게 부끄러운 삶은 아니리라. 세상 모든 것이 단단해 보이지만 다들 자기만의 부끄러운 것들을 품고 살지 않는가. 나답게 살면 그만이지 않겠는가. 무심히 내려놓은 마음이 편안하다.

산과 들에 피는 꽃과 나무는 스스로의 존재에 대하여 무슨 생각을 할까. 세상 흔들리며 살아도 꽃은 피었다 지고 바람이 불지 않아도 낙엽은 저 스스로 진다. 금시라도 세상이 뒤집어질 것같이 바람 불지만 아침이 되면 찬란한 햇살이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이다. 사람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잘 난 사람일지라도 저 혼자 애쓰며 살다보면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이다. 사람은 지독히 외롭고 쓸쓸한 날들을 지내다 보면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품게 된다. 어두운 길을 걸으며 서로가 스미며 그렇게 야무지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사는 모습이고 인생이다.

눈부신 하늘이다. 오늘도 밤새 뒤척이다 늦게 일어났다. 매일 반복되는 게으른 하루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에 대한 것이 제일 고민이다. 혼밥을 하지만 나는 국물이 없이는 잘 먹지 못한다. 어렸을 때부터 쭉 그랬다. 가끔은 내 생계와 생존 속에 갈등하며 어렵게 살아왔지만 먹을 때가 제일 행복했다. 생선 굽는 냄새가 위장을 자극할 때 행복했다. 수많은 일들이 순간마다 벌어지지만 조금은 쓸쓸하게 혼자 먹는 밥상에서 나를 바라본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며 하루하루 존재하는 것이 행복이다.

텅 빈 하늘이다. 중늙은이의 가을을 차가운 가슴으로 끌어안는다. 바람이 분다. 이렇게 바람 부는 날, 바람 맞으면 어떠하랴. 비 오는 날, 무심히 비를 맞으면 또 어떠하랴. 살며 돌부리에 채여 뒤뚱거릴 때마다 아등거리며 매달려온 삶이 부끄럽다. 어쩌면 그것이 인생이고 그것이 삶이리라. 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왜 그리 매달려 왔던지 아득하다. 천천히 나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앞만 바라보고 살았다. 선물 같은 시간을 너무 허투루 보냈다.

문득 내 삶의 이파리를 아무렇게나 떨어뜨린다. 내가 가진 욕망과 원망을 툭 떨어뜨린다. 많이 아파하며 속으로 삼킨 마음도 내려놓는다. 내려지는 삶은 물드는 것이다. 그 색이 무엇이건 특별한 나의 것을 찾기보다는 떨어져 물들여진 그리 아름답지 않은 색을 인정하며 찬찬히 바라보는 나를 본다. 그렇게 아무렇게나 물들여진 얼굴들끼리 소중히 여기고 아끼고 보듬어 주는 것이 행복이지 않겠는가. 이 가을, 그렇게 조금씩 익어가는 나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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