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소중함

2015.08.24 13:27:46

윤기윤

전문기자

[충북일보] "604동 앞에 급수차가 왔으니 물을 받아가세요."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아파트관리소 직원의 목소리를 듣고 아내와 함께 작은 들통과 커다란 그릇을 하나씩 들고 나섰다. 수도가 발달되지 않았던 60~70년대에는 몇 집 건너 어깨에 멜 수 있는 물지게에 커다란 물통은 흔했다. 하지만 시절이 좋아져 수도 시설이 편리해진 요즈음 그런 것들이 있을 턱이 없었다. 소방차 호스로 나눠주는 물을 받기 위해 아파트 주민들은 길게 줄을 서있었다. 젊은이들이야 이런 경험이 거의 없다보니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하고 투덜거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지긋이 나이 먹은 주민들은 저녁놀에 잠기는 도심을 바라보며 어떤 회상에 잠기는 듯도 했다.

"옛날에는 이렇게 물을 구하기 위해 줄 서는 일이 흔했어. 지금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를 거야. 그러니 물 귀한 줄 모르지."

하루만 참으면 해결될 것 같았던 단수사태는 사흘째 이어졌다. 그것도 집에서 주로 생활해야 하는 주말에 벌어진 일이라 찜통더위와 함께 불쾌지수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용변도 볼 수 없었고, 씻지도 못했다. 먹고 나면 설거지가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들통에 받아 놓은 물은 최대한 아껴야 했다. 끈적거리는 얼굴을 참다못해 한 바가지의 물을 떠놓고 씻는 내 모습이 거울에 비춰지자 문득, 지난 군대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80년대 초, 한겨울에 입소한 논산훈련소 4주간의 훈련 중, 가장 불편했던 일은 목욕문제였다. 간단한 세수와 양치는 가능했지만, 샤워시설이 미비해 목욕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주말저녁, 갑자기 모든 훈련병에게 세면도구를 들고 집합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목욕을 시켜준다는 것이었다. 간단한 복장을 한 채, 논산훈련소 목욕탕 앞에 길게 줄을 서서 기다렸다. 한참 만에 차례가 되어 욕탕에 들어간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커다란 욕조를 가운데 두고 신병들은 빙 둘러 서야만했다. 그때 목욕탕 조교가 소리쳤다.

"너희들에게 딱 세 바가지의 물을 허락한다. 한 바가지로는 온 몸을 적셔라. 그리고 비누로 거품을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묻힌 후, 두 번째 바가지의 물로 깨끗이 닦아내라. 그리고 마지막 바가지로 마무리한다."

단 세 바가지만으로 목욕을 끝내라는 의미였다. 어처구니없는 명령이었지만, 불과 5분 만에 20~30명의 신병들은 온 몸을 씻을 수 있었다. 마침내 세 바가지를 다 쓴 후, 조교는 선심 쓰듯 다시 말을 이었다.

"특별히, 한 바가지를 더 주겠다. 미진한 부분을 깨끗이 씻도록."

네 번째인, 마지막 한 바가지의 물은 신기하게 넘치고 남았다. 세상에 태어나 단 네 바가지의 물로 그렇게 풍요로운 목욕을 해본 기억이 없었다.

이번 청주시 단수사태로 2만여 가구와 업소가 피해를 봤지만, 어찌 보면 물의 중요성과 소중함을 온 몸으로 느끼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

"좋은 훈련을 했다고 생각한다."

청주시 상수도사업본부장이 기자회견에서 단수사태를 설명하다 무심코 던진 말이 시민들의 원성과 분노를 사기도 했다. 이번 일을 '훈련'이 아닌, 물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 준 '교훈'으로 삼는다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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