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봄

2013.03.11 14:18:58

윤기윤

前 산소마을 편집장

"내 생애 앞으로 봄을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수필가 고 피천득 선생은 아흔의 나이에 이렇게 봄을 찬양했다. 다른 계절과 달리 봄이 주는 감회는 각별하다. 청춘의 나이에는 모든 계절이 고루 순환할 뿐이지만, 지천명(知天命)의 나이가 지나고부터는 봄은 특별한 향훈을 몰고 온다. 젊은 시절에는 맡지 못하던 땅의 기운,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면서 더불어 말 그대로 소생과 약동의 에너지로 충만하기 시작하는 세상이 새삼 대견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겨우내 말라 있던 나무의 빈 가지들이 물기로 부풀어 오르며 대기에 신선한 호흡을 내뿜는 것이 보이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이즈음이다.

비단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들만이 아니다. 아파트 베란다의 종이 상자에 담겨 있는 감자 고구마들도 용케 절기의 변화를 감지하고 새로운 순을 뻗친다. 흙 속에 몸을 담그고 있지 않은 그들이 따로 햇볕을 쬐는 일도 없이 제 몸 자체로 새순을 뻗어내는 모습은 경이롭다.

우리 집 아파트 베란다 또 한 켠에는 역시 봄을 기다리는 또 다른 얼굴들이 있다. 텅 비어 있는 몸을 가진 빈 화분들이다. 화초를 좋아하지만 바쁜 직장 일에 제대로 돌보지 못해 해마다 몇 개씩 빈 화분을 만드는 아내가 자책하며 바라보는 것들이다. 봄이 오면 아내는 연례행사처럼 저 화분들을 들고 다시 화원으로 향한다. 화초 키우는 것에 별 관심 없는 남편의 지청구를 듣지 않을까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사실 나는 집 안을 승방(僧房)처럼 해놓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아름답고 좋은 것이라도 이것저것 늘어놓거나 걸어놓는 것을 즐겨하지 않는다. 대단하고 특별한 소신이 있어 법정 스님처럼 무소유의 철학적 가치관을 지닌 것은 아니지만, 물건이 많으면 어쩐지 그것들에서 풍겨나는 물성이 공연히 정신을 산란하게 만드는 것 같아 편치 않다.

그러나 또 빈 화분을 베란다에 쌓아놓게 될지언정 나는 아내가 꽃집을 둘러보고 화초를 심어 오는 것이 이제는 편안하고 즐겁다. 몇 해 전 한때 아내의 건강이 나빠진 적이 있었다. 그해 봄의 햇빛은 거실에 차고 넘쳤지만 아내가 관심을 갖지 못하는 우리 집 봄의 거실은 삭막하고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이번 봄에도 3월이 채 오기도 전에 우리 집 베란다는 제라늄, 안스리움 등 햇빛만 있으면 비교적 키우기 쉽다는 것들로 채워졌다. 특히 제라늄은 빨강, 분홍, 주홍의 꽃들이 봄빛 속에 화사한 자태로 피어나 즐거움을 주었다. 그런데 거실에 나간 아내가 비명을 지른다. 뛰어나가 보니 이제 우리 집 식구가 된 지 일 년이 다되어가는 코코(페르시안 고양이)가 꽃을 모두 뜯어 놓았다. 그동안 가두어 키운 것이 미안해 요즘 풀어 놓아 주었는데 그동안 꽃의 향기만 맡고 다니던 녀석이 탐색기를 끝내고 드디어 사고를 친 것이다. 소리를 지르건 말건 코코는 고양이 특유의 무심함으로 제라늄 화분 옆에 엎드려 조을 채비를 하고 있다.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문득 이장희 시인의 '봄은 고양이로소이다'가 떠오르며 슬몃 미소가 번진다. 봄의 정경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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