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부러진 길

2013.08.05 18:14:43

윤기윤

前 산소마을 편집장

구부러진 길을 가면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감자를 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어머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이준관- 언제부터인가 골목길에서 할머니, 어머니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만 해도 아파트보다는 단독주택의 주거 형태가 많았기 때문에 골목길에서 늦게까지 뛰어노는 아이들을 부르러 나오는 어머니들이 많았다. 뉘엿뉘엿 저녁놀 지는 서쪽 하늘을 배경으로 "누구누구야, 밥 먹어라"하는 부름은 묘한 편안함을 주었다. 날이 저물어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집에는 어머니가 따뜻한 밥상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한 아이를 데리러 나온 한 사람의 어머니를 통해서도 골목길 전체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친구를 찾는 어머니의 목소리로 인해 자연히 다른 아이들도 제각기 흩어져 저희들의 따스한 울타리로 스미듯 들어갔던 것이다.

지금은 이리저리 휘어진 수평의 골목길 시대가 아니라 반듯반듯 올라간 수직적 아파트의 시대이다. 아파트 단지 내의 길들은 물론 놀이터에서도 아이들은 찾아볼 수 없다. 요즘 같은 방학에도 놀이터는 텅 비어 있다. 아마 초·중·고생 대부분 제각기 방에 틀어박혀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앞에 매달려 있다가 점심 먹고는 학원으로 갈 것이다. 어머니들이 밖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을 품에 모으듯 불러들일 일이 없다. 어쩌다 아이를 찾는 것도 아파트 관리실에서 전달해 주는 방송을 통해서이다.

디지털은 편리함과 속도를 제공해 준다. 그런데 아날로그적 삶의 방식보다 무언가 놓치고 있는 삶의 정수가 있다. 골목길 사이사이 이리저리 숨어들듯 뛰어 놀던 아이들이, 스마트폰에 온 정신을 빼앗긴 채 오직 입시만을 강조하는 직진의 삶으로 내몰려 있는 현실이, 요즘의 학교 폭력이나 학생 자살률에 방조하는 것이라면 지나친 비약인가.

언젠가 서울에서 밤늦게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온 적이 있다. 중부고속도로를 통해 오창 쪽으로 오다 보니 고속도로를 벗어나서 구불구불 좁은 길을 한참 지나야했다.

"고속도로를 시원하게 달리다 이런 길을 운전하시려면 시간도 더 걸리고 피곤하시겠습니다." 마침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터라 기사님에게 이렇게 말을 건네 보았다.

"웬 걸요. 이런 길이 더 재미있지요. 낮에는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보이고, 밤에는 길이 구부러져 있기 때문에 긴장해서 오히려 졸지 않게 돼요. 고속도로 직진 길에는 핸들 잡고 깜박 조는 경우도 있거든요." 기사님의 대답은 의외였다. 곧게 뻗은 길로 아무 장애물 없이 삶을 내달려 온 사람보다 굴곡진 삶을 살아본 사람만이 남의 어려운 삶도 포용할 줄 알 것이다.

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

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가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이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

<저작권자 충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93건의 관련기사 더보기





충북일보 / 등록번호 : 충북 아00291 / 등록일 : 2023년 3월 20일 발행인 : (주)충북일보 연경환 / 편집인 : 함우석 / 발행일 : 2003년2월 21일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무심서로 715 전화 : 043-277-2114 팩스 : 043-277-0307
ⓒ충북일보(www.inews365.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by inews365.com, In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