틴의 화원

2013.03.25 16:41:03

윤기윤

前 산소마을 편집장

햇빛이 난만(爛漫)하게 흐르는 지난 주말, 아내와 함께 화원에 들렀다. 작년부터 아내가 단골로 가는 집이다. 나무와 꽃도 다채롭게 많이 준비해 놓았지만 그보다 아내가 주변의 다른 곳을 젖혀 놓고 그 집에 자주 가는 이유는 그 집의 직원 '틴' 때문이다.

틴은 베트남 호치민시 근처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우리나라에 시집 온, 네 살짜리 아들 하나를 둔 젊은 엄마이다. 이제 이십 대 초반이나 되었을까. 선량하고 맑은 눈망울에 호리호리한 몸매는 어쩐지 애틋한 인상을 준다. 앞치마를 두르고 서툰 한국어로 상냥스레 꽃과 나무의 특성을 설명하는 모습이 보는 이의 마음을 흐뭇하게 한다. "신흘리페페는 다복하게 심으면 보기 좋아요." "제라늄은 햇빛만 있으면 사계절 꽃을 볼 수 있고 키우기 쉬워요."

아내는 틴이 식물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는 것이, 앞치마에 흙을 묻히며 화분에 꽃을 심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단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에 시집와서 행복하게 사는 모습이 마치 자기 일처럼 뿌듯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화원 주인의 귀뜸에 의하면 틴의 남편은 나이가 많긴 하지만 틴을 무척이나 아끼고 위해주는 사람이라고 한다.

다문화가정이 모두 문제와 갈등이 많은 것은 아닐 터이지만 그동안 언론 매체를 통해 보도되는 힘들고 아픈 이야기들이 많았기에 틴처럼 밝고 씩씩하게 사는 결혼 이주 여성을 보니, 어쩐지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리라.

어린 시절 내가 처음 느껴본 이국의 정서는 베트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큰외삼촌이 파월장병이었는데 어머니에게 보내온 사진을 보면 야자수 나무 옆에 군복 차림으로 기대서 있는 모습이 많았다. 어린 내 눈에는 삼촌이 싸우러 간 것이 아니라 외국 여행을 떠난 것처럼 느껴져 무척 부러웠다. 더구나 삼촌이 돌아올 때 가지고 온 물건들은 하나같이 신기하고 좋은 것들이었다. 나중에야 그것이 미국 제품인 줄 알았지만, 당시에 월남이란 곳은 격전지가 아니라 신비롭고 아름다운 휴양지 같은 인상을 내게 심어 주었다.

그리하여 전쟁은 햇살이 화사하고 야자수 살랑이는 곳에서 벌이는 어른들의 특별한 놀이쯤으로 인식했던 것 같다. 물론 중학생이 되며 베트남에서의 참상이 어떠했는가를 차츰 알게 되었고, 대학교 시절 황석영의 '무기의 그늘'을 읽으며 베트남에 동병상련의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타국에 시집와서 꽃을 심으며 일하는 베트남 여인을 보니 어쩐지 호감이 간다. 비록 아오자이 대신 앞치마를 둘렀지만 훈훈하고 건강한 웃음으로 사람을 대하는 틴의 모습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환하게 한다.

"선생님 일 하시지요?"

화분에 살구빛 제라늄을 심던 틴이 아내를 올려다보며 말한다. 아내가 어떻게 알았느냐고 놀란 표정을 지으니 틴이 웃는다.

"말씨도 조용하고 친절하시니까요."

그때 까무잡잡한 얼굴의, 역시 베트남 사람인 듯싶은 젊은 여인이 작은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틴이 일하는 곳으로 다가왔다. "저랑 같이 이곳 청주로 시집왔는데 남편이 정신이상자래요. 그래서 이혼했어요. 지금 식당에서 일하는데 주인아줌마가 아주 잘해 주신대요. 그래도 불쌍해서 저 있는데 자주 놀러오라고 해요." 틴이 차에까지 따라와 화분을 건네주며 살짝 이야기한다. 가슴 아픈 사연이다.

틴의 화원만큼은 언제나 지금처럼 환한 봄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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