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사니 아깝다

2013.08.26 15:56:12

윤기윤

前 산소마을 편집장

결혼해서 이십 년을 넘겨 살다 보면 누구나 '혼자 살았다면 어땠을까' 하고 간혹 생각해 보는 적이 있을 것이다. 아옹다옹 복닥이는 삶에 지칠 때나 딱히 그런 일이 없더라도 사람은 자신이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이 있게 마련이다.

생전의 작가 박완서도 나이 일흔을 훌쩍 넘겨 출간했던 수필집 제목이 '못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였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로 시작하는, 시인 프로스트의 '가보지 못한 길'의 유명한 시구야 대부분 익히 알고 있을 터다.

중고등학교 아들 녀석들과 이리저리 부딪히고 부모 노릇에 지칠 때면 공연히 사서 고생하는 것 같은 한탄이 나올 때도 있다. 그리하여 주변에서 나이 마흔을 넘기고도 혼자 사는 이들을 보면 내심 그 홀가분함과 자유가 부러울 때도 있었다. 내 하나의 인생도 버거울 때가 있는데 어쩌자고 아내까지 포함하여 세 사람의 인생을 책임지게 되었는가 말이다. 식구들만 없다면 인생에서 그닥 불안할 일도 걱정할 일도 없이 혼자 유유자적한 삶을 누릴 수 있을텐데 하는 생각이 도둑처럼 슬몃슬몃 들 때가 많았던 것이다.

그러던 참에 최근 홀트아동복지회 말리 홀트 이사장(78) 인터뷰 내용을 보게 되었다. 말리 홀트 이사장은 홀트아동복지회 설립자 해리 홀트의 둘째 딸로서 수십 년간을 경기도 홀트 일산복지타운에서 장애인들과 함께 살아왔다고 한다. 그 장애인들은 입양도 안 되는 중증이어서 말리 홀트 여사는 복지타운 내 '말리의 집'에서 그러한 중증 장애인 예닐곱 명과 함께 생활해 온 것이다. 그런 그가 최근 골수암으로 투병 중이라고 한다. 그의 말은 이랬다.

"말리의 집에서 장애가 제일 심한 원생 예닐곱 명과 함께 살았어요. 내가 아파서 면역력이 약해지니까 원생들을 다른 곳으로 옮겼어요. 혼자 사니까 아깝죠."

'혼자 사니 아깝다'는 그 마지막 말이 가슴에 턱 얹혔다. 아마 그 20평 정도 된다는 말리의 집이 혼자 살기에는 넓어서 남은 공간이 아깝다는 뜻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자신이 움직이는 에너지가 온전히 자신에게만 쓰이는 것이 아깝다는 뜻으로도 해석이 되었다. 여하튼 내가 조금이라도 가진 것이 있거나, 움직일 수 있는 힘이 남아 있다면 나를 위해서가 아닌 타인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그의 신념과 의지가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평생 결혼하지 않고 스무 살 처녀 시절부터 낯선 한국 땅의 고아와 장애인들을 위해 살아온 홀트 여사는 푸른 눈과 금발이 세월에 풍화되어 정말이지 거짓말처럼 한국 할머니를 닮아 있었다.

홀트 여사의 말은 애 둘 딸린 가장 노릇에 힘겨워하며 가지 않은 길을 꿈꾸던 나의 머리를 죽비로 내려치는 것 같았다. 피가 섞이기는커녕 푸른 눈의 이방인으로서 한국에서 고아와 장애인을 내 자식처럼 돌보며 평생을 늙어온 그의 존엄한 사랑은 나를 정신이 번쩍 들게 하였다.

내가 낳은 내 자식도 힘들다고 투정 부리며 시간을 자꾸 되돌려보곤 하던 버릇이 한심하게 생각되었다. 앞으로도 식구들과 이리저리 부딪힐 때도 있겠지만 홀트 여사의 그 말은 뇌리 한 켠에 늘 죽비로 살아 있을 것만 같다.

"혼자 사니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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