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2013.12.23 15:20:12

윤기윤

前 산소마을 편집장

아내는 펄쩍 뛰었다. 지난 일요일 아침, 육거리시장에서 토끼를 사서 부모님께 가져다드렸다. 부모님에게 가기 전, 아내에게 전화를 해서 집토끼가 아닌, 산토끼라고 입을 맞추자는 제안이었다. 사실 겨울이 되면 종종 고라니나 꿩 같은 산짐승을 사냥꾼인 지인을 통해 가져다드린 적이 있으니, 이번에도 감쪽같이 속을 것이라고 믿었다.

"아휴, 어떻게 거짓말을 해요. 그냥 집토끼라고 하지."

"부모님이 집토끼인지, 산토끼인지 아시겠어? 맛있게 드시면 됐지. 선의(善意)의 거짓말은 괜찮은 거야."

아내는 영 찜찜해했지만, 나의 설득에 한 듯 하는 수 없이 동의했다. 아버지는 어려서 시골에서 자라신 탓인지 유달리 가재나 미꾸라지, 새뱅이와 같은 민물고기를 좋아하셨다.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이면 할아버지가 산에다 놓은 올가미로 산토끼를 잡아오시곤 했다고 들었다. 꿩도 좋아하셔서 어쩌다 아는 지인을 통해 꿩이라도 얻게 되면 곧바로 아버지께 보내드리곤 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무척 좋아하셨다.

몇 해 전, 가깝게 지내던 후배의 아내가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40대 중반의 젊은 나이인지라 주변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췌장암은 선고를 받고나면 1년을 못 넘기는 무서운 병이었다. 암중에서도 가장 치명적인 암이라 가망이 없어보였다. 병문안을 갔을 때, 후배의 아내는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었다. 무엇보다 남기고 갈 두 남매 걱정에 눈물로 지새웠다. 의사도 너무 암이 진행되어 기적이 없는 한 1년을 넘기기 힘들다고 선언한 후였다. 그때 유명한 역학인인 절친 K교수에게 전화를 했다.

"후배의 부인이 췌장암인데, 의사의 말로는 1년을 넘기기 힘들대. 무리한 부탁인줄 알지만 자네에게 전화가 오면, 그녀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반드시 죽지 않을 운명이라고 말해주면 안되겠나?"

친구는 담담히 그녀의 사주를 알려달라고 말했다. 며칠 후, 그녀의 사주를 살펴본 친구는 "사주로 볼 때도 장수할 운명은 아닌 것 같아. 힘들 것 같아. 하지만 내가 통화를 해서 위로를 해줄게. 사주(四柱)는 사람에게 절망이 아닌, 희망을 주는 것이거든."라고 말했다.

친구의 전화를 받고 곧바로 그녀에게 K교수의 전화번호를 손에 쥐어주면서 상담을 받아보라고 했다. 이미 K교수의 명성을 알고 있는 터라 그녀의 얼굴에 언뜻 기대감 같은 기운이 감돌았다. 한참 후,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다. 밝은 목소리였다.

"K교수님이 절대 죽지않는대요. 유명한 분이 한 말이니 믿어도 되겠지요? 80세까지 장수할 운명이라네요?"

하지만 후배의 아내는 1년을 채 못 넘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운명하기 전, 후배에게 "K교수님이 거짓말 한 거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덕분에 짧은 기간이었지만, 희망을 갖고 살았어요. 고맙다고 전해주세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자신의 명성에 흠집이 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거짓말을 해준 친구 K교수가 새삼 고마웠다.

저녁나절, 전화가 왔다. 어머니였다.

"아휴, 얘. 확실히 산토끼는 맛이 다르더라. 요새 통 입맛이 없었는데 어찌나 맛있게 먹었는지. 고마워. 정말 잘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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