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뱃돈

2014.02.03 14:20:31

윤기윤

前 산소마을 편집장

"사실이지 하나의 상징이 다른 모든 상징들을 무색하게 만들었으니, 그것은 바로 돈이다."

'조지 기싱의 고백'이란 수필집에 나오는 말이다. 그렇다. '돈' 만한 상징이 어디 있으랴.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란 무소불위의 권력이나 그 어떤 명예보다도 한 수 위이다. 심지어 사랑마저도 살 수 있다. 요즘 젊은이들이 배우자의 조건으로 꼽는 우선순위가 경제력이니 말이다. 그러니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닿지 않는 돈-차라리 쓸모가 있다면 '화폐'보다는 그림이나 글씨라도 쓸 수 있는 백지가 나으리라-이 가진 상징성이란 무시무시한 것이다.

이러한 돈을 남녀노소 불문하고 누군들 좋아하지 않으랴. 그리하여 아이들은 온 친척 어른들에게 떳떳이 '수금'할 수 있는 설날을 기다리는 것이다. 부끄럽지만 우리 아이도 제 친구한테 빌린 돈 갚는 날을 설날 이후로 약속해 놓았다. 그러니 세배의 덕담과 진심 어린 인사는 이 세뱃돈의 희열에 가려져 그 의미가 퇴색되거나 실종되어 버렸다.

우리 집안도 친가와 처가의 아이들 합해서 세뱃돈을 받는 아이들이 열일곱 명쯤 된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심 어린 세배를 드리고 차분히 앉아 어른들의 덕담을 귀담아듣기보다는 얼마를 받게 될까 하는 기대와 염려가 가득한 눈빛들이다. 아직 어린 녀석들은 받자마자 뒤돌아서서 다음 순서의 세배도 잊은 채 봉투 속 현금을 세어보기 바쁘다.

언젠가부터 이 세뱃돈을 주고받으면서 어쩐지 불편한 감정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얄팍해지는 지갑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기묘한 분배의 법칙에 무력하게 함몰된 느낌이 들어서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준 만큼 내가 조카들에게 준 세뱃돈이 적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슬며시 들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그 계기가 된 것은 삼 년 전 큰아이 작은 아이가 각각 고등학교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였다. 그전까지는 아이들이 세뱃돈을 받아도 평소보다 조금 용돈을 많이 받는 것이려니 하고 각자의 통장에 저금하거나 평소 갖고 싶은 것을 사도록 했다.

그런데 그해만큼은 상급학교에 진학한다는 의미를 담아서 삼촌, 고모, 이모들이 한눈에 보기에도 꽤 두둑한 봉투를 주는 것 같았다. 문제는 아이들이 저희들 세뱃돈이니 공개하지 않고 본인들이 알아서 저금하고 쓰겠다는 것이었다. 교복을 구입하는 데 보태야 한다고 했더니 아이들은 거세게 거부하였다. 우리 내외는 삽시간에 아이들 세뱃돈 넘보는 치졸한 부모가 되어 버렸다.

친척들도 세뱃돈 따로, 입학 축하금 따로 만들기는 이중 부담일 것이었다. 사실 설날은 졸업·입학 시즌과 맞물려 있어서 이때의 세뱃돈이란 부조금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부모는 그 액수를 알아야 나중에 조카 아이들에게 적어도 그에 따라서 답례할 수 있을 터였다.

상급학교 입학 축하금을 세뱃돈 겸해서 주는 것이라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 의미와 취지를 담아 진지하게 말하는 시간을 가져야 될 것 같다. 무엇이 그리 급한지 서로 그저 돈 봉투 건네기에만 급급하니 세뱃돈의 의미가 무색하다. 그래서 요즘 어느 집에서는 문화상품권을 준비하기도 하고 용돈 기입장에 돈을 끼워서 주기도 한다고 들었다.

아이들 세뱃돈이 각자 부모들 부조의 장으로 활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세뱃돈은 고사하고 설빔만으로도 가슴 설레던 어린 날의 설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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