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눈을 뜨다

2013.05.13 16:17:17

윤기윤

前 산소마을 편집장

"세상이 환하게 보입니다."

세상에는 두 눈이 건강해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지 못하겠지만, 아직도 우리나라에는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바로 나이 드신 할머니들입니다. 이제는 손자들에게 글을 읽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워 몰래 한글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 중 여든이 훨씬 넘은 할머니 한 분의 사연이 가슴 뭉클합니다. 할머니는 "아들이 말레이시아에 신부로 가있어요. 국제전화는 비싸서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끊어야 되니 답답해요. 이것저것 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한글을 모르니 할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이 선생님이 한글을 가르친다기에 시작했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노인복지회관에서 한글을 가르치는 이윤세(76)선생님은 2000년 진천 구정초등학교에서 교장으로 퇴직을 했습니다. 이윤세 선생님은 "퇴직 후, 무언가 세상에서 보람되게 할 일이 있을까 찾았을 때, 노인복지회관 사회복지사가 제게 한글교육을 맡아달라고 요청을 해요. 그때만 해도 '아직도 한글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있나?'하고 의아했지요. 글을 읽지 못하는 노인들을 가르치면서 그들의 아픔과 뼈저린 한(恨)을 알게 되었어요."라며 "통계상으로는 우리나라의 문맹률이 0%라고 하지만 60대 이상의 숨겨진 문맹자는 아직도 많습니다. 정말 문맹은 커다란 상처이며, 또 다른 장애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고통도 크지만, 볼 수 있으면서 읽지 못하는 고통은 아무도 이해 못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글을 읽지 못한다는 것은 생활에 불편을 주지만 더 심각한 것은 심리적인 위축이랍니다. 혹 며느리를 보았을 경우, 자신이 문맹자라는 사실이 부끄러워 자꾸만 숨어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소극적으로 변한다는 사실이지요. 그는 "그분들은 정말 가여운 삶을 살았습니다. 옛날에 시댁에서는 며느리가 글을 알면 시집생활의 어려움을 친정에 편지로 일러바칠까봐 글을 못 배우게 했어요. 또 하나는 가난이었지요. 가난한 집에서는 아무리 똑똑해도 여자를 가르치려는 부모가 없었어요."라며 "이제는 좋은 시절이 왔지만, 그분들은 이미 기억도 감퇴되었고 습관처럼 살아온 불편을 바꾸려는 본인의 의지도 주변의 노력도 없었어요. 한글을 가르치면서 그분들이 변하는 모습을 모면 정말 눈물이 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윤세 선생님께 1년 동안 한글을 배운 할머니가 한글로 말레이시아에 있는 아들에게 처음으로 이메일로 소식을 전했습니다. 아들이 감격적인 답장과 함께 돈을 부쳐 왔답니다.

"고맙고 감격스럽습니다. 세상에 어머니가 제게 편지를 쓰시다니요. 도대체 어머니에게 한글을 가르쳐준 분이 누구신지요? 꼭 함께 식사대접을 해 드리세요."

퇴임교장모임에서 동료들이 이윤세 선생님에게 "남 가르치는 것 지겹지도 않아? 평생 가르쳤으면 됐지 뭐가 아쉬워서 다시 가르쳐."라고 물으면 선생님은 말합니다.

"한글을 깨우치면서 세상이 환하게 보인다고 말하는 나이 든 제자들을 보면 이 일을 멈출 수가 없어."

내일 5월 15일이 바로 '스승의 날'이군요. 새삼 이 세상에서 참 스승의 역할이 어떤 것인지 깨우친 뜻 깊은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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