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진 화살, 부러진 법

2013.04.29 16:26:41

윤기윤

前 산소마을 편집장

오해했습니다. 2007년 처음 TV를 통해 소위 '석궁테러사건'을 접하는 순간,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죠. 교수가 석궁을 들고 재판에 불복해 재판장의 아파트로 찾아가 보복을 하다니 엄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여겼지요. 기억이 납니다. 뿔테 안경을 쓴 채, 단호한 눈매와 꽉 다문 입술의 테러사건의 주범. 한 수학자에게 언론은 '사법부의 응징'이라는 말을 부각시켰습니다. 많은 국민들이 공감했죠. 상식 없는 교수에게 법의 엄정함을 제대로 보여줘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얼마 전, 우연히 TV에서 방영된 '부러진 화살'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서서히 생각이 바뀌고 있음을 느꼈지요.

"영화 '부러진 화살'은 이전의 실화를 소재로 한 한국영화와 달리 90% 이상 실화를 소재로 만들었습니다. 실제 재판 과정은 재판의 녹취록을 바탕으로 구성된 것입니다"

'부러진 화살'을 만든 정지영 감독의 말에 새삼 이 영화가 주는 무게감과 진실이 동시에 느껴집니다. 영화를 보면서 김경호 교수가 들고 간 석궁을 이 나라의 사법부에 날려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흐릿했던 사건의 진실이 또렷해지기 시작했지요.

대학 입시시험에 출제된 수학문제 오류를 지적한 뒤, 김경호 교수는 학교 측으로부터 부당하게 해고되었습니다. 재판에서 교수지위 확인소송에 패소하고 항소심마저 정당한 사유 없이 기각되자, 담당판사를 찾아가 공정한 재판을 요구하며 석궁으로 위협하기에 이릅니다. 격렬한 몸싸움, 담당판사의 피 묻은 셔츠, 복부 2cm의 자상, 부러진 화살을 수거했다는 증언 등이 이어지자 사건의 파장은 일파만파 퍼져나갑니다. 사법부는 김경호의 행위를 법치주의에 대한 도전이자 '테러'로 규정, 피의자를 엄중 처벌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합니다. 그러나 피의자 김경호가 실제로 화살을 쏜 일이 없다며 결백을 주장하면서, 속전속결로 진행될 것 같았던 재판은 난항을 거듭합니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법정, 엇갈리는 진술, 그리고 결정적인 증거 '부러진 화살'은 행방이 묘연합니다. 비타협 원칙을 고수하며 재판장에게도 독설을 서슴지 않는 김경호의 불같은 성격에 변호사들은 하나둘씩 변론을 포기합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선임된 자칭 '양아치 변호사' 박준의 등장으로 재판은 활기를 띠기 시작합니다. 상식 없는 세상에 원칙으로 맞서는 한 남자의 뭉클한 이야기가 관객들의 마음을 흔들지요.

"재판장님, 19세기말 프랑스에서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을 기억하시는지요· 이 사건은 간첩혐의를 받은 포병대위 드레퓌스가 혐의가 없음에도 당국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종신형을 선고한 사건입니다. 훗날, 프랑스 국민들의 거센 저항을 받고 마침내 사법부는 굴복하고 맙니다. 잊지 마십시오. 재판을 시작하기도 전에 법치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여 재판을 진행한 사법부의 오만함은 영원히 부끄러움으로 남을 것이며 반드시 국민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박준 변호사의 최후변론이 가슴을 흔듭니다. '법은 아름답다'라고 말하는 피고인 김경호 교수와 '법은 쓰레기다'라고 외치는 박준 변호사의 대화가 인상적입니다. 석궁테러사건의 주인공인 김 교수는 지난 2005년 교수 복직 소송에서 패소하였고, 이후 대법원에서 징역 4년을 확정 받아 2011년 1월에 만기 출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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