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꽃

2014.02.17 10:57:50

윤기윤

前 산소마을 편집장

어디선가 조화(造花)를 마주칠 때마다 은근히 경시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아마 누구라도 조화보다는 생화의 향기와 자연스런 생명력을 윗길로 칠 것이다. 무척이나 정교하게 잘 만들어져 생화인 줄 알고 살짝 만져 봤다가 종이나 헝겊의 뻣뻣한 감촉에 실망한 적도 있다.

운전을 하고 다니다보니 라디오를 듣게 되는 때가 많다. 어떤 프로그램의 편지 사연에 사남매를 키우신 한 어머니가 조화 한 다발로 두고두고 사남매의 졸업식에 모두 활용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네 어머니들의 알뜰함에 절로 웃음이 났다. 십여 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그 꽃은 비닐에 곱게 싸여 안방 벽에 계속 걸려 있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조화꽃 한 다발도 가히 집안에 한 자리를 차지하는 가구 정도의 위상을 가졌던 것이리라.

며칠 후 또 다른 라디오 사연을 듣게 되었다. 우울증을 심하게 앓고 있는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어느 20대 딸의 사연이었다.

"아무 의욕 없이 거의 누워만 지내시던 어머니가 어느 날 공원에 산책을 나가시더니 손바닥만한 화분을 주워 오셨어요. 화분에는 앙상한 가지에 나뭇잎 몇 개만 달랑 붙어 있더군요. 어머니는 그 나뭇가지에 종이로 예쁜 꽃을 몇 송이 만들어 붙이셨어요. 그러고 물끄러미 그 꽃을 바라보고 계시더니 '얘, 나 어디 다니면서 뭣 좀 배워볼까'하시는 거예요.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저희 어머니가 만드신 꽃이 너무 예뻐 사진으로 보내드립니다."

사연을 읽은 라디오 진행자는 정말 꽃이 예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라디오라서 그 종이꽃 사진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 처음으로 종이꽃을 보고 가슴 뛰었던 때가 생각났다.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이사를 자주 다닌 편이었는데 초등학교 5학년쯤 수원으로 이사 갔을 때였다. 옆집의 중학생 누나가 나를 귀엽다며 예뻐해 주었다. 누나는 자주 나를 집으로 데려가 숙제도 돌봐 주고 공부도 가르쳐 주었다. 어느 날은 다락방에 올라가 이것저것 주섬주섬 찾더니 갖가지 빛깔의 얇은 종이를 갖고 내려와 뭔가를 접기 시작했다. 누나의 손가락 끝에서는 여러 가지 예쁜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니 한지 종류의 종이가 아니었나 싶다. 어두운 다락에 묻혀 있던 종이들이 환한 햇살 속에서 꽃으로 피어나던 정경을 경이롭게 바라보던 내 눈길에 누나는 더 자랑스럽게 꽃을 만들어 내밀었던 것 같다. 너에게 주는 선물이라면서. 그것은 내가 세상에서 처음으로 마주쳤던 종이꽃이었다. 이후 수없이 조화를 보게 되었지만 그때의 감흥이 되살아나지는 않았다.

이제 그 어머니의 종이꽃에 얽힌 라디오 사연을 듣고 보니 문득 그 누나가 정성을 다해 만들어 주었던 종이꽃이 마음에 오롯이 다시 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오 헨리의 소설 '마지막 잎새'가 떠올랐다. 화가 할아버지가 혼신의 힘을 다해 그려놓은 담벼락의 푸른 잎 한 장에 삶의 의욕을 되찾는 존지의 이야기 말이다. 자연이 피워낸 생화도 아름답지만 인간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조화도 역시 아름다운 것이다.

라디오 사연의 어머니가 다시 아름다운 생의 꽃을 피워내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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