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군 단양읍에서 영주방면으로 가다보면 소백산 죽령을 코앞에 두고 대강면에 이른다.
이곳에서 단양팔경의 한 곳인 사인암 방면으로 굽이굽이 휘어진 도로를 따라 20여분 가다보면 나타나는 곳이 방곡리다.
방곡도요 도예가 서동규 명장과 아들 찬기씨가 함께 전수관 앞에서 함께 한 모습
방곡리는 조선조 중기인 17세기부터 백자 분청사기 등 서민들을 위한 민수용 도자기를 만들던 곳으로 충북과 경북이 맞닿은 곳으로 소백산맥 수리봉(1019m)과 황정산(959m),월악산국립공원의 끝머리에 위치한 도락산(964m)이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
조선시대 옹기장이 섰던 옛점 웃점을 비롯해 일반생필품을 사고팔던 저잣거리 그리고 옛날 들병장수와 건달들이 많이 모여들어 까마귀 울음소리 같이 시끄럽다고 해서 붙여진 오목내에 5~6개의 도요가 산재해 있다.
무형문화재인 방곡도요 서동규 명장이 자신이 만든 녹자를 살펴보고 있다.
방곡리는 6.25전까지만 해도 50여호 전체가 도자기만 만들던 마을이었으나 전쟁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스테인리스와 플라스틱 그릇이 나오면서 한때 맥이 끊길 위기도 맞았다.
그러나 현재 방곡도요를 운영하는 서동규(72)씨가 홀로 맥을 이어오다 단양군에서 도예촌을 복원하면서 고향을 등졌던 이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현재는 5가구 정도가 다시 전통혼을 되살리느라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지난 2000년 도자기 명장의 반열에 올라선 서동규 명장은 고향사람들이 먹고 살길을 찾아 마을을 떠날 때도 혼자남아 우직스럽게 방곡도예촌을 지켜왔다.
특히 서 명장은 지난 7~80년대에는 도자기만으로는 도저히 생활을 이어가기가 힘들어 포기를 하려고도 했으나 도저히 미련이 남아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어려웠던 시절이었지만 마을을 떠날 생각은 꿈속에서도 하지 않고 오히려 그는 오기를 부리며 서동규 혼자만이 만들 수 있는 도자기를 만들기에 온 열정을 다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새로운 유약(잿물)을 만들어 보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인근에 자생하는 소나무나 감나무를 태운 재로 유약을 만들었으나 결과는 늘 그에게 불만으로 다가왔다.
수년째 유약 만들기에 정성을 들인 끝에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주변 산에 자생하는 느릅나무를 태워 만든 잿물이 그에게 희망을 주었다.
천편일률적인 녹색 대신에 녹두빛깔의 황녹색이 탄생한 것이다.
서 명장은 이를 '녹자'라고 이름붙이고 특허까지 받았다.
방곡도요 서동규 명장이 만든 녹자의 독특한 모양새.(이 녹자의 유액은 느릅나무 재로 독소를 해독하는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 명장이 생산하는 녹자는 표면에 미세기공이 형성돼 있어 음식을 오래 담아두어도 변질되지 않고 빨리 식지 않으며 기름기 등이 눌어붙지 않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한 여름에 음식을 담아두어도 상하지를 않을 뿐만 아니라 술을 따라 마시면 그 맛이 순해지며 독성을 해소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서명장은 녹자를 개발한 공로로 전국에 4명밖에 안 되는 도자기 명장중의 한 사람이 되는 영예도 얻었다.
그러나 이 같은 명장의 반열에 올랐음에도 어려움은 여전하다.
현재 방곡에서 도자기를 만드는 가구는 서동규 명장을 포함해 5가구에 불과하다.
이조차도 현실에서의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며 차츰 가구수가 줄어들 위기에 처해있다.
방곡도요 서동규 명장과 아들 찬기씨가 가마 앞에서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양산되는 도자기와는 차별화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일반적인 부분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 명장은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자신의 아들인 찬기(38)씨를 전수조교로 만들기 위해 무던 애를 쓰고 있다.
아들인 찬기씨가 아버지의 일을 배우기 위해 녹자 만들기를 시작한 것도 벌써 10년 가까이 이르고 있다.
아직은 서 명장의 발끝도 따라가기 어려운 실력이라고 자신을 낮춰 말하지만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갖추며 서 명장의 희망으로 자리하고 있다.
방곡도예의 명성을 잃지 않고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포기하더라도 자신과 자신의 아들은 자기 굽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서명장.
주변의 지원과 관심이 지속돼 세계 최고의 녹자로서 그 명성이 더욱 커져나가길 기대해 본다.
제천 / 이형수기자